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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2023년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 출장기

안솔비 연구원 (태재미래전략연구원)

2023.10.24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아테네 시내 어디서든 보이는 민주주의 시작의 상징, 아크로폴리스 (사진: 안솔비)

2023년 9월의 마지막 주, 그리스에서 열리는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Athens Democracy Forum)에 참가했다.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은 뉴욕타임즈가 세운 비영리 기관 ‘민주주의와 문화 재단(Democracy and Culture Foundation)’이 주관하는 연례행사로 변화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하고 다각도로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다. 태재미래전략연구원은 지난해 ‘공자-아리스토텔레스 대담’을 진행한 데 이어 올해는 태재대학교와 함께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준비했다.

(사진 출처: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

아테네가 물었다
“Do We Dare to Hope?”

인천에서 이스탄불을 경유해 아테네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7시간 남짓. 코로나 이후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에 노곤해진 몸으로 아테네국제공항에서 나오자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레몬 빛 택시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민주주의의 시초이자 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까. 국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여러 국가의 활동가와 기자, 학자, 빅테크 기업의 임원들이 모여 “Do We Dare to Hope?”라는 주제를 놓고 진지한 성찰을 나누었다.

‘AI와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다’를 주제로 기조 대화를 한 메타의 닉 클렉 사장 (사진 출처: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

기술의 투명성과 책임성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

포럼의 대주제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기술’이다. 지난해 말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은 많은 이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며 소셜미디어상의 가짜뉴스, 허위 정보, 사일로 현상과 극단주의도 함께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정치사회적 제도에 발전한 기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기술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낙관과 우려가 공존했다. 양극화된 여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무작위 표집을 이용한 ‘공적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여 투표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비용을 낮추는 방안과 인공지능 분석을 통해 대화를 분석하여 의미 있는 담화를 구축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메타의 닉 클렉(Nick Clegg) 사장은 현재의 거대언어모델과 생성형 인공지능이 AI의 미래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며,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가짜뉴스와 허위 정보의 생성이 용이해진 것은 사실이나 생성이 곧 유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AI 기술이 민주주의를 훼손하지 않고 선용 되기 위해서는 투명성과 책임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Democracy Forward Initiative를 담당하고 있는 지니 바다네스(Ginny Badanes) 역시 건강한 정보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는 투명성과 책임성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며. AI가 이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뒤에 ‘인간 사용자’가 있기 때문임을 일깨웠다. 포럼 참여자들은 기술의 위협이 커지는 만큼 정부, 지방정부, 국제기구, 테크 기업, 일반 시민과 사용자를 넘나드는 여러 층위의 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태재미래전략연구원과 태재대학교가 마련한 심포지엄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의 모습 (사진: 안솔비)

인류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설 장기적 관점 필요해

기술이 민주 사회 문제의 근원, 또는 해결이라고 보는 이분법적 시각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심포지엄에서는 AI 기술의 발전으로 개인화된 맞춤형 교육의 가능성이 열렸으나, 이 획기적인 변혁이 평등하게 적용되려면 적절한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구글의 로열 핸슨(Royal Hansen) 보안 엔지니어링 부사장은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포용하되 개인적 차원의 책임감과 정부 차원의 규제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으며,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경험과 사회화를 축으로 하는 ‘깊숙한 곳까지 인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AI가 인간 교사나 학급 친구들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 역시 선언적 지식을 암기하고 습득하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공감 능력과 협업 능력을 함양하는 방향의 새로운 교육 시스템 개편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기술이 주는 유익을 활용하되 기술로 교육을 대체하거나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극단주의를 심화시키는 기술의 남용 문제는 ‘더 나은 기술’로 해결될 수 없다는 논의가 꾸준히 나왔다. 권력과 권력 정치의 문제에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장기적 관점’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다양성, 포용성, 연대와 책임이 지금의 권력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부상한다. 당장 오늘, 당장 이번 선거를 넘어서는 장기적 관점이 있어야 기후 위기, 양극화 등 현재 인류의 생존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여러 도전 과제에 맞설 수 있다. 위기가 코 앞까지 다가온 것 같은 순간에야말로, 장기적 관점을 견지하며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ADF가 진행되는 동안 옆 건물에서는 10대들이 참여하는 Teens for Democracy가 열렸다.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청소년이 모여 자신들의 관심사를 토론하고 의미있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자리였다.
사진은 Teens for Democracy에 참여한 10대 청소년들이 태재대학교 소개에 집중하는 모습 (사진: 안솔비)

“Do we dare to hope?
Yes, we dare to hope. We
should dare to hope.”

이번 포럼의 개회식에서 “Youth Beyond Lip Service”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한 리아는 친구 에리카와 함께 시민 서비스(civic service)를 활용해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며 민주적 시민 소양을 함양하는 그리스 활동가이다. 리아와 에리카는 여름 내내 산불에 시달린 그리스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며 기후 위기는 지금 당장, 그리스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임을 호소했다. (실제로 9월 말의 그리스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한 기후라고 네이버에서 읽고 간 것과 달리 출장 기간 내내 ‘뇌우 경보’ 알림이 오고 낙뢰를 동반한 비가 몰아쳤다.)

아테네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에서 디지털 시대의 직업 변화를 연구하는 빌야나(왼)와
AI를 활용한 디지털 숙의민주주의를 꿈꾸는 개발자 드미트리(오) (사진: 안솔비)

디지털 전환이 가져오는 사회 변화와 지속가능성을 연구하며 나는 자주 절망했다. 기술의 변화를 추적하다 보면 그 양면성을 누구보다 먼저, 깊이 보게 된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현 체제는 지속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번 포럼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나와 다르지 않았다. 리아, 에리카, 드미트리, 신시아, 콘스탄티나, 빌야나… 단상 위에서,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 속에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절망하고 주저앉기보다는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민주주의는 퇴화하고 기후 위기가 우리를 곧 덮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 아니, 절망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 나서는 그들을 보며 이번 포럼의 주제에 대한 답을 얻었다.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이번 포럼에서 만나 친구가 된 드미트리는 나에게 ‘지혜’라는 뜻의 그리스 이름 ‘소피아’를 붙여주고 (‘솔비’의 영어 발음이 ‘소피’와 비슷하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간단한 그리스어를 가르쳐주었다. ‘진리, 진실’의 뜻을 지닌 ‘알리시아(alitheia, Αλήθεια)’라는 단어는 영어의 not과 같이 ‘부정’을 뜻하는 ‘a-(α-)’와 ‘망각’을 뜻하는 ‘lithi(λήθι)’가 결합된 단어라고 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잊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무언가라면, 기술 발전에 따라 심화되는 기후 위기, 양극화되고 분열되는 사회 속에서 잊지 않고 붙잡아야 할 민주적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주제를 막론하고 자주 등장했던 핵심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투명성, 책임성, 포용성, 다양성과 같은 단어들이다. 기술의 발전이 제도의 변화를 불어온다면 그 변화는 투명하고, 사회적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 사회는 다양성을 포용하며,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연대하고, 나와 다른 이들의 인간성과 존엄을 존중해야 한다.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희망을 말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 너머 미래를 보며, 오늘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구원에서의 일도 다르지 않다. 거대한 망각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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