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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기의 설계자들]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 혁신국가로 만든 시몬 페레스

작성자 : 황동일 2019.07.26 조회수 : 4806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 혁신국가로 만든 시몬 페레스  

“과학에는 국경도 영토도 없다”

- 생존 위해 과학을 택했다


<편집자 주>

대전환기다. 냉전 40년 만에 탈냉전과 미국 단일 패권시대가 왔고, 그 이후 30년 만에 패권 질서 재편의 시기에 들어섰다. 여기에 4차 디지털 혁명이 기술과 표준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국제정치와 경제의 권력이동이 가로 세로축으로 교차하면서 세계적 수준에서 격랑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이런 대변동기에 야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전장(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되거나 식민지가 되거나 분단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사드를 빌미로 한 중국의 위협, 강제징용자 문제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가 한국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한다. 며칠 전에는 러시아 전투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들어왔다. 새로이 열리는 위기의 징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시대의 성패도 갈릴 것이다. 크게 보고 현명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사에는 전환기적 상황 속에서 국가를 일으켜 세운 거목들이 있다. 여시재는 그들로부터 이 대전환기를 헤쳐나갈 슬기와 지혜를 얻고자 한다. 이번 순서는 이스라엘을 현재의 혁신국가로 만든 시몬 페레스 전 대통령이다. 



시몬 페레스는?

70년간 이스라엘을 위해 일했다. 10번의 장관직과 3번의 총리를 역임했고,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1923년 8월 현 폴란드 비쉬네바에서 태어나 11살 때인 1934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2016년 9월 93세로 사망했다. 

페레스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25세의 나이로 초대 수상인 벤구리온의 비서가 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29세에 국방부 국장, 35세에 국회의원, 45세부터는 여러 장관직을 거쳐 1977년 55세에 총리가 되었다. 1993년 외무부 장관 시절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의 평화협정인 ‘오슬로협정’ 체결에 성공하여, 이듬해 야세르 아라파트 PLO 행정수반 및 이츠야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7년 이스라엘 대통령 직을 수행하였고, 201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건국 초기 아랍 제국들과의 여러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프랑스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의 동맹 체결 및 국교 정상화, PLO 및 요르단 등과의 평화협정 체결, 원자력 도입과 항공우주산업 진흥, 벤처 창업 생태계 구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윤종록 번역, 쌤앤파커스)가 있다.   




“나는 새로운 창세기를 쓰기 위해 생존한다”

지난 7월 16일 여시재 이광재 원장과 윤종록 가천대학교 석좌교수(전 미래창조과학부 차관)가 시몬 페레스의 혁신 리더십을 주제로 대담했다. 윤 교수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민관을 넘나들며 활약한 전문가이자 시몬 페레스 대통령과 직접 교분을 나누고 그의 자서전을 번역하기도 한 시몬 페레스 ‘통’이다. 

이 원장과 윤 교수 모두 변변한 자원 하나 없이 세계 리더 국가의 반열에 오른 이스라엘의 경험과 이 과정을 이끈 시몬 페레스의 리더십이 오늘날 심각한 정치·경제적 대전환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고 했다. 윤 차관은 시몬 페레스를 ‘이스라엘의 다산 정약용’에 비유하면서 “70년 동안 장관 수상 대통령 등 거의 전 영역을 거치면서 갓 태어난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의 혁신 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시몬 페레스는 우리로 치면 나이 스물다섯에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출발해서 80세를 훨씬 넘겨 대통령을 했다”며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했을까”라고 했다. 그는 페페스가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과정을 통과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페레스가 99%가 아니라 100% 애국심의 소유자였다는 점, 둘째 우리 대한민국처럼 이스라엘도 자원이 전혀 없는 나라로서 국가를 어떻게 경영할지의 문제가 엄청나게 중요했는데 페레스 대통령 스스로가 ‘내 브레인은 과거로 가는 기억이 아니라 미래로 가는 상상이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는 상상력과 도전을 통해 이스라엘을 최고의 혁신국가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세 번째로 세상(tikkun)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다(olam)는 뜻의 ‘티쿤 올람’이라는 히브리어 말이 있는데 이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윤 교수는 페레스가 자서전에서 ‘우리는 단지 역사를 스쳐가는 그림자가 되기 위해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세기를 쓰고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티쿤 올람의 원칙에 몰두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생존했다’고 밝혔다며 “애국심, 미래를 향한 상상력,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티쿤 올람의 신념, 이 세 가지가 우리 식으로 빗대서 얘기하자면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가 70년 간 살아남은 힘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회주의서 자본주의로 대전환 주도

1984년 시몬 페레스가 처음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를 당시 연간 인플레율이 400%에 달할 만큼 이스라엘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페레스가 총리에 취임하기 한해 전인 1983년 텔아비브 증권거래소 주식이 폭락하고 도산 직전의 은행 5곳 중 4곳을 국영화했을 만큼 이스라엘 경제는 풍전등화였다. 페레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는 경제적 난제뿐만 아니라 리더십 문제도 놓여 있었다. 경제를 다시 안정시키는 유일한 길은 경제 전반에 대한 체질 개선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는 데는 큰 고통이 필요했다. 나는 이해관계 충돌이라는 거미줄의 중심에 내던져졌다.” 사회주의 계열 정당 소속의 연립정부 총리로서 시몬 페레스는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동자 계층에게 큰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경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페레스는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기반이었던 사회주의 체제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자본주의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디뎌야 했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후에는 시장경제에 대한 접근법에 통달해야 했다”고 했다. 정권을 내줄 수 있음은 물론,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분열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 체질을 개선하고, 정부가 주도하는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합의를 도출해 냄으로써 건국 후 이스라엘이 맞닥뜨린 최대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극복해냈다.

이광재 원장은 “페레스 대통령이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해 자기 지지자를 설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득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마오쩌둥 중국 국가 주석과 회담이 가능했고, 독일의 슈뢰더 총리도 사회 민주주의자로서 자기 지지자들이 반대하는 노동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했기 때문에 오늘날 독일 경제의 번영이 가능했던 것처럼 결국 국가와 사회가 전환기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라면 자기 지지자와도 논쟁하고 협상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 물도 자원도 없는 척박한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나눠 쓰는 키부츠 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이 성공하면서 훨씬 더 많은 전 세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게 된다. 결국 농업만으로는 이 인구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윤 교수는 “결국 농업국가이자 철저한 사회주의 체제 국가인 이스라엘을 과학기술에 근거하는 국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국가로 바꾸려다 보니 당연히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요했고 이를 적용하려다 보니 기존 노동자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저항이 나왔다”며 “이것을 노사 간에만 맡겨두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오겠다 해서 페레스 당시 총리가 정부가 직접 당사자로서 개입하는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 마지막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잠을 안 자고 몇 날 며칠을 머리를 맞댄 끝에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고 했다. 윤 교수는 “400%를 넘는 인플레이션이 합의와 동시에 순식간에 2.5%까지 떨어지면서 이스라엘이 세계 최고의 혁신국가, 창업국가로 올라서는 계기가 이때 마련되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방과 6.25전쟁 이후 20년간은 외국 원조로 연명하는 나라에서 중화학공업과 정보통신산업 두 축을 통해 우뚝 일어섰다”며 “하지만 두 산업 모두가 일본과 중국 등에게 큰 위협을 받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의 미래를 먹여 살릴 새로운 혁신과 산업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혜택을 보는 쪽과 피해를 보는 쪽의 대립적인 양자구도가 펼쳐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우리 정부와 국민들을 포함한 4자가 참여하는 노사정 틀 속에서 이해관계자의 생각의 폭을 넓혀 양자 간의 극한 대결을 넘어 새로운 답을 함께 모색하면 얼마든지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국가의 존망이라는 여건 앞에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제 체제 자체를 바꿨던 것처럼 우리도 미래의 큰 전환의 방향을 보면서 크게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빼앗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 과학”

근대 국가에서 영토는 국력과 국부의 핵심 원천이었다. 페레스의 말대로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력을 증진하기 위해 대부분 무력을 통해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물과 자원 하나 없는 척박한 사막 땅만을 국제적으로 허용 받았고, 사방의 적에 둘러싸여 영토를 늘릴 수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이었다. 페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은 영토와 달리 국경이나 국적이 없다. 과학은 탱크로 정복할 수 없고, 전투기로 보호받을 수 없다. 과학은 한계가 없다. 한 국가는 다른 국가로부터 어떤 것도 강제로 빼앗지 않고 과학적 업적을 신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과학적 업적은 국가의 모든 부를 끌어올릴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아무도 패배하지 않고 모두가 승리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는 것이다.”

페레스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탱크와 전투기, 미사일도 늘렸지만 과학과 지식 기술을 통해 세계 최고의 혁신국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해수담수화 기술, 원자력 안전기술, 인터넷 보안 기술, USB 등이 모두 이스라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머리와 손을 거쳐 세상에 선보였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전쟁을 잘하는 국가가 아닌 최첨단 과학 지식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창업과 혁신을 잘하는 국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건국도 하기 전에 공과대학부터 만들었다” 



이스라엘 건국보다 앞선 1912년 과학기술 연구개발과 교육을 위해 설립된 테크니온 공대(The Technion–Israel Institute of Technology)


이광재 원장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해서 나라가 만들어지기도 전인 1912년에 대학부터 만드는데 이 대학이 지금으로 치면 카이스트, MIT 같은 공과대학”이라며 “왜 공과대학이냐 하면 앞으로 만들어질 나라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두뇌의 힘으로 공학을 발전시켜서 그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스라엘은 오로지 두뇌와 과학기술의 힘으로 국가적 난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이 원장은 “온통 사막뿐인데다 강수량도 모자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가 식수였는데 식수 문제 해결을 위해 엄청나게 싼 비용으로 바닷물을 담수로 만드는 기술을 만들어낸다”며 “톤당 52센트의 전기료만 투자하면 1톤의 바닷물을 담수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이게 1970년대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다”고 했다. 이 원장은 이어 “또 석유를 비롯해 마땅한 에너지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힘든 상황에서 원자력 에너지 확보를 위해 세계 최초로 중수를 이용해 중성자를 흡수하여 안정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운용하는 원자력 안전기술을 개발했다”며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의 80%가 1980년대 후반부터 지어지는데, 이게 대부분 이스라엘 특허 기술로 만들어졌다. 이런 사례는 인터넷 보안 기술 등 무수히 많다”고 말했다. 


“바다를 상상하라, 우주를 상상하라, 생명을 상상하라”

윤 교수는 “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지휘하는 국가 컨트롤 타워가 바로 부총리 산하 수석과학관실”이라고 했다 그는 “수석과학관실은 말하자면 이스라엘 경제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위해 악보를 그려내는 곳”이라며 “2005년 수석과학관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150명이 넘는 최고 역량의 연구원들이 사실상 평생 임기를 보장받고 당장의 이해관계나 정파적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10, 20년 후 이스라엘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윤 교수는 “이때 중요한 기준점이 되는 것이 페레스 대통령이 재임 당시 제시했던 세 가지 축인데, ‘첫째 저 깊은 바다를 상상하고 탐험하자, 둘째 저 광활한 우주를 상상하고 탐험하자, 셋째 저 심오한 생명을 상상하고 탐험하자’였다”며 “페레스는 죽었지만 그가 제시한 비전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올해 2월 21일에 세계 4번째로 달 탐사선을 발사했고(달 도착 5분 전에 추락하여 21년까지 다시 발사할 계획), 현재 스타트업의 60% 이상이 생명과학 관련 기업들이다. 

이 원장은 “우리나라가 한 해 20조 원가량의 연구개발비를 쓰는데 프로젝트 수가 5만 개에 관리 비용만 2조 원이 든다”라고 지적하면서 “도전적이고 중장기적인 R&D가 필요한 프로젝트는 정부가, 산업화로 연결 가능한 프로젝트는 민간으로 과감히 역할을 분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이것을 결정하는 데 우리끼리만 할 게 아니라 싱가포르처럼 세계적인 석학과 과학기술 전문가를 초빙하여 그들의 지혜와 통찰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볼만 하다” 고 제안했다. 

이 원장과 윤 교수는 과학기술 발전에 있어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했다. 윤 교수는 “우리나라 교육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원료를 넣어서 제품을 만드는 걸 제일 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앞으로는 상상력을 혁신으로 연결시키는 것으로 교육 전체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은 “노벨상은 시상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거대한 지식 허브이자 플랫폼”이라고 전제하면서 “세계적인 지식을 빨아들이는 한국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시몬 페레스는 1985년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 병력을 철수시키는 한편, 1993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오슬로협정을 체결, 평화 공존의 큰 틀에 합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공로로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던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공동으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주전파로 힘을 확보한 뒤 

협상가로 나서다

정치인이자 관료로서 페레스 대통령의 경력과 업적 중 많은 부분이 국방과 외교 분야와 관계되어 있다. 그는 건국 초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여러 번의 전쟁에서 ‘주전파’의 입장에 서서 이스라엘 승리의 일익을 담당했고, 정규전이 아닌 대테러 전쟁에서도 ‘엔테베작전’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어 ‘테러리스트와는 절대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국제적 규준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프랑스로부터 비밀리에 원자력을 도입하여 주변 중동 국가들에 대한 핵 억지력을 확보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온건파 정치인이자 평화론자이기도 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의 협상을 타결했고, 요르단과의 평화협정에도 성공했다. 그 결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라빈이 이스라엘 극우파의 총탄에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윤 교수는 “페레스는 과학기술과 원자력 등 어마어마하게 하드파워를 기르는 정치를 했는데 이 모든 노력의 종착지가 결국은 세계 평화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페레스는 평화라는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는 내가 협상에 나갈 자격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내부의 힘, 하드파워를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실제 이스라엘이 공격받지 않을 만큼 힘을 확보한 후에는 평화를 위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했다”라고 했다. 




이 원장은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갈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왜 똑같은 구약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2000년 가까이 갈등하고 충돌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데, 남북한은 같은 피, 같은 민족에 분단된 지 70년 밖에 안됐는데도 아직까지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된다”며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처칠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고받은 손으로 쓴 편지가 860통에 달했다. 그런 상호 이해와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무기대여법까지 만들어 수세에 빠진 영국과 유럽을 구원하러 참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 원장은 “남북이 70년간의 세월을 뛰어넘어 화해와 통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려면 지도자들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은 좋은 총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이스라엘은 방아쇠를 당기는 방법을 배운다”

이 원장은 대담을 마무리 지으면서 한국인에 비해 평균 지능지수가 10이나 떨어지고 전 세계 1600만 명 밖에 안되는 유대인이 전 세계 금융과 대학, 미디어, 문화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요인과 비결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윤 교수는 ‘후츠파 정신’을 첫 번째로 꼽았다. “후츠파는 이스라엘 특유의 도전정신을 일컫는 말로 어려서부터 형식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하며, 때로는 뻔뻔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히는 태도와 정신 자세를 말한다”고 했다. 윤 교수는 이어 “이스라엘에서는 ‘10개를 가르쳐주고 나머지는 너희들이 채워봐’ 그러면 아이들이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나머지 90개를 채우는데 우리는 선생님이 100개를 적어주고 외우라고 한다”며 “그러니 우리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뭘 배웠니?’라고 물어보고 이스라엘에서는 ‘뭘 물어봤니?’라고 묻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총과 방아쇠에 비유하는 것으로 한국과 이스라엘의 차이를 정리했다.

“유대인 평균 아이큐 96과 한국인 평균 아이큐 106의 차이는 96 밀리미터짜리 총과 총알, 106 밀리미터짜리 총과 총알처럼 꽤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폭발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실제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총알과 통도 녹슬어갈 뿐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겁 없이 방아쇠를 당겨보고 자기들끼리 안 맞은 이유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고 또다시 방아쇠를 당겨보고 하다 보면 명중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좋은 총과 총알을 만드는 데 집중할 뿐 정작 겁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금지하는 교육 아닌가. 이제는 우리도 겁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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