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상단으로이동

[새로운 가치연구 ②] 이태원은 책임이 없다

김은환 (작가∙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2020.06.07

코로나가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눈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태원 거리 모습 (출처: 연합뉴스)

(재)여시재는 작가이자 경영환경 전문가 김은환과 함께 대전환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치체계’ 연구를 진행해왔다. 대전환은 손에 잡히거나 잡히지 않는 여러 곳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대전환을 통칭 디지털 전환이라 해왔다. 그러나 그 진폭은 이 말로 다 포괄할 수 없다. 이번 ‘가치 연구’도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식이 이번에 코로나19와 결합하면서 우리의 질문을 더 근본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도대체 가치란 무엇인가? 과연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문명의 전개, 지금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가치는 무엇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번에 문제 제기라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난 4월 26일 그 첫 편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분제, 미래로 향한 길을 가로막고 있다’에 이어 두 번째 편을 소개한다.

김은환은 조직이론 전문가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들어가 오랫동안 일했다. 경영전략실장과 산업전략실장을 지냈고 이후 그만둔 뒤 책을 쓰고 있다. 2017년 ‘기업 진화의 비밀: 기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9년 ‘산업혁명의 숨은 주역들’을 썼다.

검열 없는 무정부주의 국가와 비슷한
코로나 바이러스

바이러스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있었다. 이번의 바이러스, 코로나19의 특징은 무증상 상태에서 2주 정도 잠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균자가 건강한 상태로 상당 기간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만으로도 위협적이지만 글로벌화와 맞물리면서 파괴력이 증폭되었다. 국제교류와 해외여행이 바이러스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리고 팬데믹이 왔다.

에이즈, 사스, 에볼라, 메르스,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진화는 멈추지 않는다. 코로나는 사라져도 새로운 변종이 나타날 것이다. 바이러스는 생물과 달리 유전자 오류를 잘 수정하지 못한다. 검열이 없는 무정부주의 국가와 비슷하다. 정상적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끝없이 변종을 만들어낸다. 끝없는 변이의 물결을 타고 이들은 백신과 치료제를 우회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을들이 상호 격리되어 고립 생활을 한다면 그 어떤 바이러스라도 엔데믹, 즉 풍토병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구촌이 되어버린 오늘날 이런 고립은 불가능하다. 글로벌화가 가져온 개방과 연결은 예상치 못한 위험을 불러들였다.

팬데믹이 일과성 사건이 되는가,
아니면 시대전환의 트리거가 되는가는
바로 우리에게 달렸다

코로나가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드높다. 그 와중에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견도 들린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대니 로드릭 교수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지금처럼 천천히 죽어갈 것이고 포퓰리즘 정권은 더욱 독단적이 될 것이며 좌파는 표심을 얻으려는 선심정책에 열중할 것이다.” ¹

¹ Dany Rodrik, 2020.4.6, “Will COVID-19 Remake the World?”, Project Syndicate

날씨 예측도 종종 어긋나지만, 인간 세상을 예측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인간 세상은 기상과 달리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시시각각 영향을 받는다. 코로나와 인간 사회 사이에 기계적인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날 것이다. 팬데믹이 일과성의 사건이 되는가 새로운 시대의 트리거가 되는가는 우리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 중 하나가 민법의 기본 전제인 ‘자기 책임의 원칙’이다. 이것은 ‘과실 책임의 원칙’이라고도 불리는데, 사람은 오직 자신이 저지른 과실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과실이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부주의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심코 버린 담뱃불이 큰 규모의 산불로 번졌을 경우, 부주의가 인정된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부주의’라는 말이 중요한데 그것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히 기울였어야 할 주의를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성냥불을 버린 지역이 숲 근처이고 날씨가 건조했다면, 산불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로 간주된다. 이런 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히 우연한 계기로 - 예를 들면 이례적인 돌풍에 의해 - 불이 퍼졌다면 다툼의 여지가 있다. 행동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가 예측 가능한가 아닌가에 따라 책임의 유무가 가려지는 것이다.

‘헤니페니’는 서양 어린이들이 우리나라 ‘해순이 달순이’ 처럼 듣고 자라는 동화의 주인공이다. 병아리 헤니페니는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에 깜짝 놀란다. 그는 수탉 ‘코키로키’에게 “하늘이 무너진다”고 소리친다. 이후 오리 ‘더키러키’ 거위 ‘구지루지’, 칠면조 ‘터키러키’, 여우 ‘폭시록시’에게 연이어 하늘이 무너진다고 외치고 동물들은 대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해프닝임을 알아챈 여우는 이들을 자신의 동굴로 꾀어 모두 잡아먹는다.

Cf. 헤니페니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 민속학자 조지프 제이콥스(1854)가 수집한 영국 민담 140개 중 하나이자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 병아리 이름이다. 제이콥스가 수집한 민담 중에는 ‘잭과 콩나무’ ‘아기 돼지 세 마리’ ‘거인을 죽인 잭’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이 많다.

Cf. 외부효과(External effect)
어떤 사람 또는 집단의 경제활동이 다른 사람 또는 집단에 의도치 않은 혜택이나 손해를 가져다주는 일

헤니페니에겐 잘못이 없다

집단 패닉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스토리다. 하나의 도토리가 점점 증폭되어 동물 전체의 패닉으로 번져나갔다. 이것은 북경의 나비 날갯짓이 뉴욕에 비를 내린다는 ‘나비효과’와 비슷하다. 이와 비슷한 경제 현상으로 ‘뱅크런’이 있다. 한 고객이 자신의 은행이 도산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루머를 듣는다. 그는 이를 주변에 알린다. 소문이 일파만파 퍼진다. 사람들이 돈을 인출하러 일시에 몰려든다. 처음에는 소문이었던 은행 도산이 현실이 된다. ²

² Stephen G. Cecchetti, Kermit L. Schoenholtz, 2020, “Contagion: Bank runs and COVID-19”, in Economics in the Time of COVID-19 (Edited by Richard Baldwin, Beatrice Weder di Mauro), CEPR Press

극단적으로 한 명의 환자가 전인류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팬데믹은 헤니페니의 소동과 같다. 헤니페니가 정말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작은 잘못이 우연한 몇 가지 계기로 증폭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잘못의 크기와 그것이 일으킨 해악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다.

(출처: 뉴스1)

“이태원 방문객 때문에
공든 탑 무너졌다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수그러들던 코로나 사태가 특정 경로로 재연되었을 때 박원순 서울 시장은 “몇 사람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진 것에 시민들의 허탈함과 분노는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감이 안 가는 바 아니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태원 클럽 방문객으로 인해 코로나가 재연되었다”는 것은 일단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니었다면 코로나는 종료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차이를 간과한 것이다.
팬데믹의 책임을 특정 집단에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 무증상 감염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라도 지역 감염의 전파자가 될 수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작은 행동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경험은 일상이 되어 간다. 증상을 느끼고도 개인적 이유로 감염을 숨긴 사람들의 행위까지 옹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요구되는 모든 주의사항을 지키고도 전파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개인이 나비효과까지 감안할 수 없다
따라서 책임도 질 수 없다

행동과 그 결과 사이의 비례 관계가 무너지면서 과실 책임의 원리는 약화된다. 단 한 명이 수백만 명을 감염시킬 수 있지만, 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각 개인이 나비효과조차 감안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할뿐더러 효과도 없다. 나비효과의 발생 확률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징벌적 배상으로 팬데믹을 예방하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정의롭지도 못하다.

‘공유지의 비극’
절대적 법칙 아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책임 주체를 확장하는 것, 즉 공동체 전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장 “모두의 책임은 아무의 책임도 아니다”라는 반론이 떠오른다.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이다. 시장원리주의자들은 이 논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왔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관철되는 절대적 법칙이 아니다.

유력한 代案으로 부상하는
‘공동체’적 가치

대기오염, 어종의 남획, 교통체증, 쓰레기 대란 등이 공동책임 폐단의 단골 사례로 제시되지만, 이를 반박하는 사례도 많다.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그의 저서 <공유의 비극을 넘어>라는 책에서 공동체의 성공 사례를 분석했다. 그가 소속된 인디애나 대학의 학자들이 함께 사례 조사를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1000개의 사례가 수집되었고 이 숫자는 조사가 끝날 때쯤 5000개에 달했다. ³ 오스트롬은 가장 두드러진 것들을 엄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늘날의 공동체는 많은 곳에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력한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³ Elinor Ostrom, 2015,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도덕적 해이 보다
각자도생이 더 위험하다

자본주의는 경쟁에 기초하며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에 대한 배려에 소극적이다. 배려는 도덕적 해이를 초래해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한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관념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상황이 변하고 있다. 팬데믹에 대처할 역량이 부족한 취약계층이 바이러스의 전파 통로가 된다. 경쟁 지상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이들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들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사회적 부주의’다.

도덕적 해이보다는 시장 원리가 조장하는 각자도생이 더 위험하다. 미국의 실패는 상징적이다. 의료 민영화 추진의 주된 논거 중 하나가 ‘도덕적 해이’였다. 보편적 의료보험이란 열심히 건강 관리하는 사람들이, 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의 치료비를 내주는 꼴이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팬데믹을 당하고 보니 사상 유례없는 오판이 되었다. 코로나 사태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고 할 때, 시장 원리에 대한 맹신은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

손해보험과 의료보험의 근본적 차이

해상 보험의 역사를 생각해 보자. 당시 대양을 횡단하는 항해는 매우 위험했다. 보험을 통해 여러 대의 선박이 실패를 공유함으로써 위험을 관리(hedge)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항해의 위험과 팬데믹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위험(risk)과 불확실성(uncertainty)의 차이다. 항해의 실패 확률은 측정이 가능하다. 그래서 보험도 가능하다. 또한 한 척의 배가 풍랑을 만났다고 해서 그 위험이 다른 배로 전파되지도 않는다.

반면 증폭하는 외부효과는 ‘위험’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 즉 ‘불확실성’을 초래한다. 확률조차 다가갈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보험으로는 부족하다. 공공 의료 시스템과 같은 공동체적 역량과 인프라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공동체를 위한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자세와 헌신이 필요하다. 현재 코로나와 싸우는 질본과 의료진이 보여주는 주인의식과 인간애가 그것이다.

팬데믹 같은 카오스적 상황에서는
민간 부문만으론 대처 못한다

우리는 늘 공공 부문은 민간 부문보다 비효율적이라고 들어왔다. 이윤 동기로 무장한 민간부문이 더욱 효율적이고 기민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 부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확률이 주어지는 위험 단계에 작동하는 것이며, 팬데믹과 같은 혼돈의 불확실성 단계에는 그렇지 못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카오스적 상황에서는, 각자의 이익이 정확하게 계산되기 어렵다. 이익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공적 원리가 중요해진다.

긍정적 바이럴로서의 革新

바이러스는 질병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자연계에는 유익한 종류의 바이러스도 있다. 최근에는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번져가는 콘텐츠를 가리켜 ‘바이럴’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것, 유익한 것이 번지는 것도 바이럴이다. 대표적인 것이 혁신이다. 혁신적 기술과 상품은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잠복하다가 어느 지점을 넘는 순간 급격하게 확산된다. 전염병과 유사하다. 단지 그 결과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여는 미래일 뿐이다.

혁신은 촉진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억제의 대상인 바이러스와 반대다. 하지만 중요한 공통점도 있다. 둘 모두 사회 전체로는 바람직한 수준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시장이 유력한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보건 분야에서 의료 민영화가 추진된 것처럼, 혁신 분야에서도 특허 등 지적재산권 제도가 만들어졌다. 혁신의 성과를 혁신자에게 정확하게 되돌려 주고 주변의 무임승차를 막으면 혁신이 저절로 촉진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혁신의 전파를 위해서도
공동체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장원리의 적용이 예상 외의 부작용을 일으켰다. ‘특허 전쟁’이라고 불리는 끝없는 기업 간 소송, 또한 특허를 통해 돈을 벌려는 ‘특허 괴물(patent troll)’의 등장으로 오히려 혁신이 저해되는 실정이다.

지식은 재산이 아니며 특허는 혁신의 방해물이라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201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로머는 무임승차는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근본 동력인 ‘긍정적 외부효과’라고 본다. 혁신의 성과를 정확하게 측정해서 특허료로 지불하도록 하면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혁신이 재산권의 경계를 넘어 흘러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혁신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혁신도 없다

혁신은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이다. 하나의 혁신은 이전의 수많은 혁신으로부터 영감과 아이디어를 물려받는다. 동시에 혁신은 사회로 퍼져나가면서 다른 아이디어를 자극하여 수많은 파생적 기술로 이어진다. 이를 간과하고 오로지 재산권의 경계를 설정하는데 급급한다면 혁신은 얼어붙고 만다.

인센티브가 만병통치약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산업과 경제발전의 핵심이 인센티브라고 들어왔다. 물론 인센티브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혁신 초기에는 인센티브 보다 아이디어의 공유가 더 중요하다. 반도체는 수많은 특허에 의해 보호되는 첨단 기술 산업이지만 개발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의 실리콘밸리 지역에 모인 초기 벤처 기업가들은 아무 제한 없이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했으며 그 결과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성공을 일구었다.

Mike Hobday, 1994, “The limits of silicon valley: a critique of network theory”, Technology Analysis & Strategic Management

만약 이들이 처음부터 낱낱의 아이디어마다 소유권을 다퉜다면 새로운 기술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의 반도체 개척자들은 당장의 이윤보다는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는 비전과 열정으로 일했다. 전염병 대응에서도 그렇듯이 혁신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차원 높은 정신, 즉 도덕이 요구되는 것이다.

“도덕적 해이 푸는 열쇠는 모럴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까닭은 빵 장수나 푸줏간 주인의 박애심이 아니라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속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외부 효과가 바이럴처럼 번져가는 오늘에는 박애심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개인의 행동이 전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지 못한다. 본의 아닌 대재난을 일으킬 수도 있고 아무 잘못도 없이 타인의 실수로 파멸할 수도 있다.

시대정신이 변화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센티브에서 모럴로의 이행이다. 도덕적 해이는 ‘도덕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무관한 이익의 재구성으로 해결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도덕적 해이를 푸는 열쇠는 도덕”이라는 자명한 결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도덕이란 공동체에 대한 책무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는 독립적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긴밀한 부분들이었다. 다섯 손가락 그 무엇을 물어도 온몸이 아픈 연결체인 것이다. 그동안 경제학 등 사회과학은 가치판단이나 도덕을 배제하고 오로지 효용의 계산만으로 사회적 솔루션을 제시하려고 시도해 왔으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Samuel Bowles, 2016, The Moral Economy - Why Good Incentives Are No Substitute for Good Citizens, Yale University Press

개인은 과감하게 도전하고
공동체는 위험을 관리

팬데믹이 과실 책임의 원리를 무너뜨린다면, 4차 산업혁명은 성공-보상의 원리를 무너뜨린다. 성공한 벤처와 실패한 벤처의 차이는 무엇일까?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같은 대답을 한다. 그 차이는 ‘운’이다. 성공을 향한 보장된 길은 없다. 큰 위험을 감수한 벤처 중 극히 일부가 성공한다. 성공은 수많은 실패들의 힘에 기대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성공을 보상하되 실패 또한 껴안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회적으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개인이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안전한 길, 즉 공무원, 자격증, 대기업으로 인재가 몰린다. 오늘날 세상이 직면한 거대한 불확실성은 개인에겐 불감당이다.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젊은이를 매도할 수 없다. 아무리 ‘멋진 신세계’를 약속하는 도전 기회도 개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불확실성일 뿐이다.

개인들이 대담하게 도전하려면 불확실성을 공동체가 감당해줘야 한다. 실패를 모두의 힘으로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불확실성 시대의 실패는 오류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성공과 실패 모두 가치 있는 도전의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 코로나 사태가 몇몇 사람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듯, 위대한 혁신도 몇몇 사람의 아이디어 덕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과실이며 우리 모두의 성과다.

코로나 사태는 저절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느끼고 인식과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변화의 방향이 결정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가 개인주의적 자유와 책임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제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무섭게 바뀌어간다. 새로운 눈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말한 것처럼, 빨리 달리는 세상으로부터 까마득하게 뒤처지고 말 것이다.


< 저작권자 © 태재미래전략연구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콘텐츠 연재물:

연관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