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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치연구 ①]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분제, 미래로 향한 길을 가로막고 있다

김은환 (작가·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2020.04.26

한국사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재)여시재는 작가이자 경영환경 전문가 김은환과 함께 대전환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치체계’ 연구를 진행해왔다. 대전환은 손에 잡히거나 잡히지 않는 여러 곳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대전환을 통칭 디지털 전환이라 해왔다. 그러나 그 진폭은 이 말로 다 포괄할 수 없다. 이번 ‘가치 연구’도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식이 이번에 코로나19와 결합하면서 우리의 질문을 더 근본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도대체 가치란 무엇인가? 과연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문명의 전개, 지금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가치는 무엇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번에 문제 제기라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첫 편을 소개한다.

김은환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와 성균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직이론이 전공분야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들어가 오랫동안 일했다. 경영전략실장과 산업전략실장을 지냈고 이후 그만둔 뒤 책을 쓰고 있다. 2017년 ‘기업 진화의 비밀: 기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9년 ‘산업혁명의 숨은 주역들’을 썼다.

脫皮, 목숨을 건 위태로운 모험

갑각류나 파충류 등 일부 동물은 탈피의 과정을 거친다. 몸은 자라는데 피부는 함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을 개략적으로 보면 몸과 피부가 비례하면서 함께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탈피(Ecdysis·脫皮)는 목숨을 건 위태로운 모험이다.

파충류도 그렇지만 곤충은 특히 몸에 세밀한 굴곡이 많아 껍질을 온전히 벗는 것이 큰일이다. 껍질이 몸과 엉켜서 몸이 찌그러지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도 있다. 신경이 연결되어 있는 껍질을 벗는 과정은 인간으로 치면 폐를 찢는 고통이라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그들의 몸뚱이는 이런 고통과 시련을 품고 있다.

글로벌스탠더드 도입도
탈피 과정이었다

인간 사회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사회 경제적 발전이 신체의 성장이라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제도, 문화, 가치는 표피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회적 표피는 논리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점진적인 사회 경제 발전에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 버틴다. 그러다가 고통스러운 탈피의 순간을 맞게 된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개시된 산업화와 고도성장,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구조개혁과 글로벌스탠더드 도입으로 탈피 과정을 겪었다. 이제 디지털 전환기 또는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가치와 제도의 근본적 변화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는 생각지도 못한,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예정된 충격이다.

서울광장에서 펼쳐진 퀴어문화축제 모습 (출처: 연합뉴스)

균열은 가치 충돌의 최전선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몸뚱이와 표피의 긴장은 신체 전체에서 똑같이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여유가 없는 부분의 표피가 뜯어지듯 균열이 먼저 나타나는 곳이 있다. 이곳이 가치 충돌의 최전선이다. 오늘날의 균열은 특히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둘러싼 갈등에서 온다.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또는 퀴어라고 하는 성소수자는 그 한 예다. 이것은 사회 내 일부 소수자 집단을 보호하는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 오바마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은 이제 결혼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다른 그 누구라도 그러하듯이(Gay and lesbian couples now have the right to marry, just like anyone else).” 오바마는 결혼이라는 권리의 보편성이 확인된 것을 축하하고 있다.

민주주의 발달 과정을 돌아보면 늘 소외된 소수자가 변화의 선봉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부유층 부르주아에게만 허용되었던 선거권은 치열한 투쟁 끝에 소시민, 노동자, 농민, 여성, 그리고 유색인종에까지 확대되었다. 각 시기마다 선거권을 요구했던 당시의 정치적 소수파는 그 시대 가치 균열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이것은 특수한 소수 집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자라나는 성장의 이야기였다.

전통에서 세속으로, 그 다음은?

매일 숨을 쉬면서도 의식하지 않던 공기가 미세먼지 문제가 불거지면 중대한 관심사가 된다. 가치도 그와 비슷하다. 가치란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준거이면서도 현실에서는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발전이 가치와 충돌할 때 가치는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된다. 그렇다면 가치란 도대체 무엇인가.

비엔나에 본부를 두고 있는 민간연구기관 <세계가치조사(WVS: World Value Survey)>는 지난 40년간 세계 각국의 가치를 5년 단위로 조사해왔다. 이들은 가치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프레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로축은 전통지향 대 세속지향이다. 전통을 통해 주어진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와, 이를 벗어나 물질적인 기준에 의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대비시킨다. 세속화는 근대 이후 대부분의 사회가 밟고 있는 경로다. 지금도 일부 무슬림 국가의 경우 전통의 권위는 강력하다. 최근 여성에게 자동차 운전을 허용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지체된 세속화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가로축은 생존 추구 대 자아실현 추구다. 삶의 가치가 생존에 집중되느냐, 아니면 개성과 선호에 따라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느냐의 차이다. 이 차이는 경제적 수준과 같은 환경의 지배력에 영향을 받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도 생존에 집착할 수 있고 가진 것이 적어도 자기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다.

두 축을 교차하면 사분면이 나온다. I분면은 전통의 권위를 인정하며 생존에 집착하는 경우이다. 종교의 권위가 강하고 경제력은 약한,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한 사회의 모습이다. II분면은 전통의 권위로부터 이탈하여 세속화가 진행된 반면 생존의 중요성이 여전히 다른 가치를 압도하는 사회다. 모든 성공은 물질의 기준으로 평가되고 개성이나 자유의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III분면은 세속적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개성을 추구하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갖추려고 노력한다. 반면 IV분면은 아직 전통의 권위 내에 머물면서 물질적 기준에 따른 경쟁이나 노력에는 매진하지 않고 “안빈낙도” 또는 “카르페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기라)”의 삶을 살아간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가치 지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자료 출처: http://www.worldvaluessurvey.org/WVSContents.jsp - Findings & Insights)

I분면은 이슬람권, II분면은 정교 유럽(구공산권)과 유교권, III분면은 프로테스탄트 유럽, 그리고 IV 분면은 라틴아메리카가 자리 잡았다. 대체로 상식과 이미지에 부합하는 결과로 보인다. 세계가치조사는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가치 간에 우열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가치가 진화하는 큰 흐름은 있다고 본다. 시계열적으로 보면 모든 국가의 데이터들이 그래프에서 우상향 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세속지향-자아실현 추구의 III분면으로 진화의 방향이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III분면의 가치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디지털 전환기 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속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고도성장기 대량생산 시대에는 합리추구, 경쟁 지향이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은 플랫폼 경제를 통한 롱테일 이코노미, 혁신의 일상화, 조직의 다운사이징 등 전혀 다른 환경이 전개된다. 더구나 인공지능에 의해 일상적 직무들이 대체될 경우 인간은 보다 인간적인, 즉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는 양적 성과를 기준으로 상호 경쟁하는 마인드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인 가치관은 어디쯤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가치의 진화 방향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전통적 권위를 벗어나 물질적 기준에 의한 합리성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가 일어나고 선진국으로부터 이양된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근면성을 강조하는 노동윤리가 형성된다. 중동-아프리카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으며, 자본주의로 이행 중인 구 공산권 국가, 그리고 7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의 한국과 유사하다.

2.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향상되고 앞만 보고 달리던 워커홀릭 문화에 대한 자성이 일어난다. 개인적 삶을 중시하는 “욜로”, “워라밸” 등의 키워드가 등장하고 사회적으로 유망한 경력을 버리고 귀촌 등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확산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주 무대가 아닌 여가 시간 등 개인적 영역에 국한된다.

3. 개인적으로 추구하던 재미와 의미가 차츰 동호회 등 공동체적인 관심사로 확장되고 환경, 인권, 불평등 등 사회적 이슈로 심화된다. 취미가 메이커스, 스타트업 등 본격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된다. 이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이슈를 제기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계로 발전한다. 자신만의 자아실현이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성숙화로 연결된다.

한국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세계가치조사의 자료에 의하면 다른 유교권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2단계를 거치고 3단계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다. 자율, 자극, 재미를 중시하는 단계에서 이타, 포용, 박애로 나아가야 하는 단계이다. 개인 차원에 갖혀 있는 삶의 질이 주변의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2단계에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다. 1990년대 자료와 현재의 자료에 거의 변화가 없다. 우리 경제는 압축성장으로 빈곤 상태를 벗어난 후 선진국 문턱에서 “중진국 트랩”을 만난 바 있다. 가치 역시 유교적 전통을 벗어나 세속화, 합리화로의 진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이로부터 자아실현으로 향하는 길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개인적 차원인 2단계의 변화는 나타나고 있으나 3단계의 변화, 즉 공동체 차원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지 않고 있다.

(출처: 뉴시스)

정상과 비정상을 단호히 구분하는 사회에서
혁신은 자랄 수 없다

왜 한국인의 가치는 진화를 멈춘 것일까, 또는 지체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빅데이터, 인공지능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을까.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모델, 워커홀릭적 근면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롤 모델을 추격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시장은 초 세분화(granularization) 되고 메 가히트 상품도 1~2년을 넘기지 못하는 마이크로 트렌드의 시대다. 어제의 성공은 잊어버리고 매일매일을 초심으로 시작해야 한다. 재미와 자극을 추구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가치관이라면 흥미진진한 세상이지만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불확실성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고용안정을 쫓아 공무원 시험에 몰린다. 생존 추구의 차원에서 자아실현 추구로 옮기기 힘들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이라는 사회경제적 변화는 고용안정에 올인하는 마인드와는 양립할 수 없다. 균열이 발생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나 트랜스젠더의 여대 입학은 이런 문제와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기저에서 꿈틀거리는 근원적 긴장이 분출된 약한 고리이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오늘날의 환경은 사람의 다양성, 그리고 이 다양성을 용인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요구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정상적인 존재들 간의 획일적 단결로 문제를 해결해 오던 우리의 가치관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마이너리티 집단에 대한 사회적 포용은 단순히 소수집단을 위한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가 자유로운 사고, 창의성의 발휘를 자극하기 어렵다. 정상과 비정상을 단호하게 구별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혁신은 자라날 수 없다.

“실제로는 불공정한 것들이
가장 공정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과거에는 한 전제군주의 독선과 오만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우월의식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서열의식이 문제다. 능력주의, 즉 메리토크러시는 신분제 사회의 불공정성을 타파하기 위한 진보의 아이콘으로서 등장했다. 그러나 소득 차별이 학력 차별을 낳고, 학력 차별이 소득 차별을 더 확대하는 오늘날엔 그 공정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4당 5락”으로 집약되는 학력 신봉의 나라 한국에서 메리토크러시 신화는 약화되지 않고 있이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낡은 시험제도가 여전히 능력주의라는 미명 아래 공정성의 보루가 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메리토크러시 신화”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높다. 예일대학의 법학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는 2015년 예일대 졸업식 축사에서 “신 귀족사회”라는 제목으로 “능력주의는 현대판 귀족사회, 신분제이며 교육과 재능이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이익에 종사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했다. 간단한 앱으로도 해결되는 수학 문제를 제한 시간 내에 누가 더 빨리 푸는가의 경쟁으로 학교가 결정되고 결국 평생을 결정한다. 이것은 불공정성을 떠나 우리 사회의 미래 준비를 지연시키고 과거에 고착되도록 만든다.

귀족 사회에서는 혈연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불공평이 드러나 있기라도 했다. 지금은 능력주의 제도 때문에 실제로는 불공정한 것이 가장 공정한 것으로 포장된다. 능력주의의 꼭대기에 선 사회지배세력은 도덕적 정당성을 향유하며 조금의 주저도 없이 부의 양극화를 받아들인다. 결국 사회는 낡은 능력 기준에 얽매여 치열한 점수 경쟁에 매달린다. 미래 환경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지식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외우는데 막대한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고 있다.

낡은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한국의 가치 진화에 중대한 장애요인

낡은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 한국의 가치 진화에 중대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소득과 생활 수준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획일화된 능력 기준에 따라 성공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더 오르려고 경쟁한다. 경쟁에서 승리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더 나은 삶을 보장받는 반면, 패배하면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잘못된 능력 기준이나 절차에 대한 문제 제기 또는 대안의 제시는 패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모든 사회질서가 경쟁의 승패에 따라 골품제도나 카스트처럼 수직서열화된 세상에서 공동체는 발붙일 곳이 없다. 각자도생의 무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자아실현이란 “욜로”나 “워라밸”의 개인적 공간으로 위축되고 공동체나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될 여력이 없다. 이것이 한국인의 가치관이 현재의 지점에서 정체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진화는 흐른다

진화는 비록 느릴지라도 몇몇 정책 결정자나 지배세력에 의해 저지될 수 없는 크고 무거운 흐름이다. 현재의 일부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서부터 표출되는 균열은 솔기선을 따라 점점 더 퍼져나갈 것이다. 멈춰 있는 듯 보이는 빙하의 흐름이 산을 깎고 계곡을 채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불완전 탈피의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사회경제의 발전이 가치를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우리의 고착된 가치가 발전을 억압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의 가치적 배경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크고 작은 판단의 기저에는 근본 가치가 도사리고 있다. 가치가 서서히 진화하면서 가치 내부에 어긋남이 생기고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일관성을 잃고 혼란에 빠진다. 너무나 당연하고 옳다고 생각했던 공정성의 기준마저 흔들린다. 달라진 현실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세우려는 시도가 나타나는가 하면, 혼돈과 혼란을 회피하려고 기존의 가치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화되기도 한다. 그 결과 변화의 조짐은 기피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 대한 혐오는 쌍방 간 증폭되어, 다양성의 인정과 포용이라는 다원 사회의 가치관과는 가장 거리가 먼 상황이 벌어진다. 멀리서 보면 일관돼 보이는 빙하의 흐름도 지형 등 국지적 특성에 의해 역전되거나 뒤틀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희망적인 것은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을 가치와 관련된 중요한 제도적 변화들이 하나둘씩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별 정정 신청을 허용한 대법원 판결,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 복무에 대한 합헌 판정 등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학교인권조례와 국가인권회의에서 이루어진 “반성문 강요 금지” 결정이 눈에 띈다. 이제 교사는 학생에게 반성문 작성을 강요할 수 없다. 반성이란 인간 내면의 자발적 행동으로서 다른 사람이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명령에 의한 반성”이란 말은 이미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이는 유럽에서는 수백 년 동안 발전해 온 “양심의 자유”와 관련된,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에 대한, 늦었지만 중요한 일보전진이다. 일부 교사들은 이에 대해 교권 침해라고 반발했다고 하는데,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의 내면은 전적으로 자유의 영역이라는 근본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는 가치의 진화를 목격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길인가를 동시에 느낀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면서, 위그노를 배척하여 프랑스 산업혁명의 진로를 가로막은 태양왕 루이 14세를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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