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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재 북리뷰] “대미 종속이 아시아 속 고립을 강화하고 이 고립이 대미 종속을 강화하는 나라” - 현대 일본의 본질을 파헤친 두 권의 책, ‘영속 패전론’과 ‘희망과 헌법’

황세희 (여시재 대외협력팀장)

2019.10.24

일본 도쿄 시내에 걸린 자민당 광고판.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1954)’에서 빌어왔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7인의 자민당 정치인이 새 시대를 연다는 내용이다. (출처: 동아일보)

(*책의 원문을 살리기 위해 일왕은 천황으로 통일하여 표기한다)

지난 10월 22일, 나루히토 천황 즉위식이 열렸다. 실제 즉위는 지난 4월이었지만 즉위식까지 6개월이 걸렸다. 이 6개월 동안 일본은 나라 전체가 ‘천황의 즉위’, 이 한 가지에 열광했다. 나루히토는 히로히토, 아키히토에 이어 현재의 헌법에 의해 즉위한 세 번째 천황이 됐다.

현 일본 헌법은 사실상 미군정(GHQ)이 만든 것이다. 핵심은 9조 ‘전쟁포기’ 조항과 그에 앞선 1~8조 천황 관련 조항이다. 미 군정은 일본을 ‘천황과 그 신민의 나라’(라이샤워 각서)로 보고 천황을 미 군정 협조자로 만드는 것이 일본을 지배하는 쉬운 길이라고 봤다. 그래서 히로히토를 전범에서 제외하고 헌법에 ‘상징 천황’ 조항을 넣었다. 미국은 동시에 일본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9조를 넣었다. 말하자면 두 가지는 교환관계다. 냉전 격화로 머지않아 자위대가 창설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9조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헌법과 관련한 기묘한 ‘3각 관계’가 형성돼 있다. 천황들은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사실상 ‘호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때 호헌은 상징 천황제와 평화조항에 대한 유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보수 진영은 9조를 없애자고 한다. 미국이 만든 헌법이 천황을 국가의 중심으로 올려세웠고 거기에 근거한 천황들이 호헌 입장을 우회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아베 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정치 주류들은 천황은 살리고 9조는 없애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총리와 보수파는 1990년대 후반부터 9조 철폐를 준비해왔다. 아베 총리는 이것을 ‘보통국가화’라 부른다. 아직 국민 과반의 지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해왔다. 특히 2011년 3∙11 대지진 이후의 위기감과 내셔널리즘의 바람을 타고 있다.

(출처: 뉴시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이와는 상극이라 할만한 전혀 다른 역사관이 존재한다.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패전과 그 책임에 정면에서 맞서지 않았기 때문에 ‘대일본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고, 그 길로 가면 ‘영원한 패전’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시각이다.

현대 일본에 내재된 위험을 폭로하는 두 권의 책을 골랐다.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 패전론’과 사카이 나오코의 ‘희망과 헌법’이다. 앞의 것은 정치학적 접근이고 뒤에 것은 철학적 접근이다. 두 사람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헌법이 어떻게 왜곡됐는지, 그래서 어떻게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들의 정신을 비틀고 있는지를 파헤친다.

두 사람의 저작을 단순히 개헌 반대, 혹은 우익 세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름 붙이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일본 지식인에게 있어 아베 정권으로 대변되는 보수 우익에 대한 비판이 곧장 일본의 진보세력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두 사람은 어느 쪽의 진영 논리를 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서 양 진영의 허점을 관찰하고 있다. 아쉽게도 1990년대 무라야마 연립정권의 퇴장 이후 일본 정계에서 사실상 진보세력이라 불릴만한 정치 담론은 약화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폭주하고 있는 보수우익의 모순과 취약한 구조를 밝히고 일본 사회가 회피해온 현실을 일깨우는 것이 두 책의 사명이다.

일본 자민당은 올해 ‘레이와’ 시대의 개막과 함께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의 정치인 7인을 사무라이로 묘사한 포스터를 제작해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다’(新時代の幕開け)라는 슬로건 아래 말에 올라탄 아베 총리는 메이지 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를 연상시킨다. 반년이 넘는 새로운 천황의 즉위 기간 내내 아베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적극 활용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강조함으로써 개헌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셈이 녹아있다.

사카이가 책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우리’를 말한다. 시라이는 ‘전후’의 진정한 종식을 내다보고 있다. 과연 일본에서 이것들이 실현될 수 있을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시라이 사토시, 영속패전론: 전후일본의 핵심(이숲, 2017)
白井聡, 永続敗戦論 ―戦後日本の核心― (太田出版, 2013)

일본 지식인 내부의 헌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개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로 아베 총리의 자문기구인 ‘안전보장의 법적 기반의 재구축에 관한 간담회’(安全保障の法的基盤の再構築に関する懇談会, 이하 안보간담회) 에 소속되어 있다. 유엔대사를 지낸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JICA(일본국제협력기구 이사장)이 좌장을 맡았던 안보간담회 멤버들은 일본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공헌하고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개헌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식의 개헌에 반대, 혹은 우려하는 지식인도 적지 않다. ‘영속패전론’을 쓴 시라이 사토시 교토세이카대학 교수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출처: 연합뉴스)

일본은 전체가 ‘무책임의 시스템’

2013년 출간된 ‘영속패전론’은 이례적인 호응을 얻었다.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한 만화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대담집인 ‘속국민주주의론: 이 지배는 언제 졸업할 수 있을까’(属国民主主義論 ― この支配からいつ卒業できるのか), ‘국체론: 국화와 성조기’ (国体論 菊と星条旗) 등을 통해 시라이는 무모할 정도로 굽힘 없이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저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시라이는 패전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에 끊임없이 종속되어온 일본을 적나라하게 분석했다. 이 책은 2011년 있었던 3∙11 동일본 대지진과 이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원전 사고에 노출된 일본의 실상을 저자는 ‘모욕’이라고 표현한다. 정확한 사고 처리와 원인 규명, 피해자 보상보다는 은폐와 소극적 대응에 급급한 정부와 전력회사가 보여준 행태가 일본 사회가 처해 있는 모욕의 상황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나아가 이러한 사회 현상이 전후 체제가 전전(戦前), 전중(戦中)과 동일한 ‘무책임 체계’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아울러 국가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할 언론과 대학, 연구기관들 역시 이들과 공범이라고 평가한다. 책은 기상연구자들이 방사성 물질 확산 예측을 알리려 하자 당시 일본기상학회 이사장이 저지한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 전반에 만연한 무책임 체계를 전후 일본과 겹쳐 보았다. 전범 처리를 위해 열린 도쿄재판에서 피고들이 주장했던 ‘전쟁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전쟁으로 내몰렸다’는 증언을 마루야마 마사오(일본 정치사상학의 권위자, 1996년 작고)가 분노했던 일과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라이는 일본 사회 모두가 ‘모욕’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임을 인식할 것을 촉구한다.

‘대일본제국’을 긍정하려는 욕망

시라이에게 있어 3∙11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였던 일본의 ‘전후’가 사라졌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전후 일본 체제는 미국의 ‘전후 민주주의’ 아래서 비무장과 경제중심 성장전략을 추구했다. 이러한 전후 체제 속에 일본이 향유했던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을 시라이는 전후 체제의 상속분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와 번영을 영위하는 과정의 유산으로 전쟁 시기의 제국주의적 일본을 부정해 왔다. 21세기 들어 이어진 중국의 부상과 글로벌 경제 위기, 미중 경쟁 속에서 일본은 과거와 같은 번영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시라이는 수정주의적 우익의 목소리가 커진 것을 ‘좋은 시절’이었던 전후가 끝났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전후 일본의 다테마에(표면상의 명분)였던 ‘대일본제국 부정’이 긍정의 욕망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일본 사회에는 전후 체제의 상속분인 평화와 번영은 사라지고 부(負)의 유산인 과거사 문제에 대한 책임만이 남았다. 사카이는 과거사 문제를 회피하는 충동을 ‘(평화와 번영과 같은) 유산은 필요 없으니 (전쟁책임이라는) 상속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라고 정의 내린다.

“일본은 왜 패전이라 안하고
굳이 종전이라고 하는가”

일본 사회에서는 ‘패전’ 대신 ‘종전’이라는 단어를 빈번히 사용한다. ‘종전’에는 전쟁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인식이 은연 중에 깔려 있다. 이는 뒤에 다룰 펠라스 메모에도 언급되어 있는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과도 연관되어 있다. 히로히토 천황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정치적 결단을 통해 일본 정치에 자신이 관여한 적이 두 차례 있음을 증언한다. 그 중 한 번이 바로 무조건 항복을 결단한 1945년 ‘어전회의’였다(나머지 한 번은 천황 친정을 주장한 황도파 장교들이 일으켰던 1936년의 2.26 사건 당시 반란파들에게 군대 복귀를 명령한 것이었다. 반란파들은 천황에 명령에 따라 쿠데타를 포기하고 투항하거나 자결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한 군부의 반발을 세 번이나 물리치고 전쟁의 종결을 ‘결단’한 것이 천황이라는 논리는 천황이 전쟁 책임을 면하는 주요한 근거였다.

같은 맥락에서 시라이는 ‘전후’의 시작을 ‘종전기념일’로 부르는 인식에 주목한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일본의 패배가 확정된 이날을 전쟁이 ‘끝난’ 날로 평가하는, 즉 ‘패전’을 ‘종전’으로 바꿔 부르는 기만이 전후 일본 체제의 근본을 이룬다고 단언한다. 시라이는 패전 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의미에서 직접적인 대미종속구조가 영속화한 한편, 패전 인식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부인하는 이중구조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패전을 부인함으로써 미국에 끝없이 종속되며, 대미 종속이 깊이 이어지는 ‘영속패전’의 구조가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독립’이 가져다 준 ‘전후 민주주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막상 진정한 ‘전후 종식’을 실천하지 않는 언행불일치가 나타난다. 시라이는 애국주의를 표방하는 우파가 ‘친미우익’이나 ‘친미보수’를 자임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우익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탱하기 위해 타국의 힘으로 내셔널리즘의 바탕을 이루는 매우 기괴한 구조가 벌어진다고 설명한다.

천황을 면책한 미국을
부정해야 하는 우익의 모순

때문에 패전을 부인하면서도 ‘전후 민주주의’ 속에서 세력을 키워온 일본 우익들의 수정주의적 충동은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패전을 부인하고자 하는 충동은 전후 미국이 설계한 평화 헌법, 극동 재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아베 정권이 그토록 주창해온 ‘전후로부터의 탈각’은 기실 미국이 설계한 전후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나 아베 정권의 이러한 충동이 추구하는 자주 국가 일본은 결국 천황에 대한 면책을 용인한 미국을 부정해야 한다.

시라이는 일본의 보수 우익들이 미국에 대한 부정을 감행하는 대신, 국내와 아시아에 대해서는 패전을 부인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을 충족시킨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대미 종속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고립을 부채질하고, 그 고립이 다시 대미 종속을 강화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패전을 부인하므로 패배가 무기한 계속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영속 패전’이다.

중국과 일본이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와 독도

센카쿠엔 영토 문제가 없다고 하고
독도엔 있다고 하는 이중성

저자는 패전, 특히 아시아에서의 패전을 부인해 온 일본이 가져온 유해한 현상으로 영토 문제에 주목한다. 독도, 센카쿠, 북방 영토 등 일본이 영토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각각의 사안이 역사적 경위나 일본의 실효 지배 여부 등의 차이가 있으나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일본 고유 영토’라는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 내셔널리즘이 중대한 정치적 사실과 역사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세 가지 영토 문제가 동일한 양상을 띤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의 지배 권력이 패전 사실을 떳떳이 인정할 수 없기에 영토 문제의 합리적 해결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진단한다. 또한 일본의 영토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 중국, 소련이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본 정부가 영토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중 잣대를 견지해 왔음을 지적한다. 즉 일본 정부의 영토 문제에 대한 방침은 실효지배 중인 센카쿠에 대해서는 영토 분쟁 자체를 인정치 않고, 그렇지 않은 독도와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영토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이중 잣대가 사라지면 ‘일본 고유 영토’ 개념은 붕괴할 수밖에 없고 일본은 포츠담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돌아가 패전을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영토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패전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를 외면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시라이는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작성한 서문에서 독도를 둘러싼 양국 정부의 주장 중에 한국 정부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했다. 그러나 독도의 ‘진짜 주인’을 결정하려는 양국의 내셔널리스트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었다. 무조건 우리 영토, 라는 식의 과잉된 영토 내셔널리즘이 개인의 정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그는 경계하고 있다.

북한 문제 역시 시라이는 영속 패전의 구조에서 분석한다. ‘가해자로 불리는 것이 곧 패전’을 의미한다면, 납치 문제에서 비롯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의 변신은 일본인에게 마음 놓고 패전을 부인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전후 일본이 구축해 온 대외관계가 ‘돈으로 사서’ ‘평화와 번영’을 누려온 시대인데 비해 북한만이 이러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이웃이었다. 일본인 납치를 통해 ‘전쟁’을 계속해온 북한은 ‘식민지 지배 = 사죄 +경제원조+납치 피해’라는 등가교환을 요구했다. 저자는 이것이 한일 간의 ‘식민지 지배 = 경제 원조(한일 기본조약)’이나 중일 간의 ‘침략행위 = 사죄 + 경제원조(중일 공동성명)’와는 전혀 다른 등식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개된 전쟁을 멈추려면 일본은 패전을 직면해야 하는데 이는 ‘영속 패전’을 바탕으로 하는 일본 체제 속에서 어려운 일이다. 시라이는 북한의 납치 문제가 일본 국가 차원에서 보자면 처음으로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직면하게 했고 이런 의미에서 납치 문제가 ‘전후를 종식했다’고 보았다. 북한 납치 문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정치인의 태도는 자신이 피해자일 때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가해자일 때는 ‘돈으로 해결’하려는 이중 잣대일 뿐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이러한 모순을 외면한 채 북한의 납치 사건은 헌법 개정을 통해 패전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영토 문제와 북한 문제를 통해 시라이는 일본이 부인해온 전후 체제의 본질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패전을 부인하며 전후 체제의 불만을 표해온 보수 세력은 이러한 전후의 종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영토 문제와 북한 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전후 체제의 종식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패전을 받아들일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미국이 만든 전후 체제에 대한 불편한 진실

‘영속 패전’의 주요한 요소는 미국이다. 전후를 지속시킨 것은 미국의 안전보장체제가 제공한 ‘평화와 번영’이었다.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 성장에 전념해 온 ‘헌법9조’가 일본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다. 시라이는 평화헌법과 비핵 3원칙(핵을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 등으로 대표되는 평화국가의 허약한 실체를 지적한다. 매년 8월 6일 진행되는 히로시마 원폭 기념일의 총리 연설문에는 줄곧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라는 정체성에 더하여 평화 국가 일본에 대한 의지가 되풀이된다. 올해 진행된 아베 총리의 연설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본만이 겪은 피폭 체험을 강조하며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피폭의 비참한 실상을 접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할’ 체계를 준비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라는 정체성은 이 사건이 패전 끝에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음을 은폐하고 있다. 시라이는 일본의 내셔널리스트들이 피폭의 경험이 가져올 ‘치욕’의 기억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원폭 투하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주체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당시 정부였다는 자각을 외면하기 위해서이다.

아베 정권이 맞닥뜨린 영속패전의 미로

아베 정권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주장하며 일본의 외교 안보 기조로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웠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주장해 온 도쿄재단 상석연구원인 후쿠시마 아키코(福島安紀子)는 그간의 일본이 평화 헌법에 의거해 평화의 파괴자, 침략자가 되지 않는, 즉 ‘~하지 않는’이라는 ‘부정의 논리’에 역점을 둔 소극적인 자세로서의 ‘소극적 평화주의(passive pacifism)’를 추구해왔다고 본다.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가 가능해지면서 적극적 평화주의는 아베 정권에게 심리적 만족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 함은 미국이 설계한 일본의 국가상에서의 탈각을 의미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아베 정권은 이를 개헌과 ‘대등한 미일 동맹’이라는 지향을 가지고 실행해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시라이가 지적해온 영속 패전의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의 안보 및 외교 전략상의 미국 의존은 미일 동맹의 일체화라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헌법 1조(상징천황)와 9조(전쟁의 방기)라는 교환 속에 성립한 헌법 개정은 결국 천황제 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개헌을 통해 ‘보통 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9조의 제약을 이유로 회피해 왔던 미일 동맹 내의 군사적 역할 분담을 전면적으로 강요받게 될 것이다.

사카이 나오키의 ‘희망과 헌법: 일본국 헌법의 발화 주체와 응답’(그린비, 2019)
원저: 酒井直樹, 希望と憲法 - 日本国憲法の発話主体と応答(以文社, 2008)

사카이 나오키의 ‘희망과 헌법: 일본국 헌법의 발화 주체와 응답’은 2008년에 씌어졌다. 이 책이 천황 승계와 한일 갈등이 동시 진행된 올해 여름에야 번역서로 국내에 출간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책에 녹아 있는 문제의식은 상징 천황과 일본 헌법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일본 보수 우익의 사고 구조를 이해하기에 손색이 없다.

일본 헌법 1조와 9조의 교환 관계

일본국 헌법의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반한다’ 이다. 1조부터 8조까지로 구성된 일본국 헌법의 제1장은 천황의 지위와 국민주권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다. 개헌 논의의 핵심인 헌법 9조는 제2장인 ‘전쟁의 방기(放棄)’의 첫 번째 조항이다. 천황의 지위를 규정한 다음 이에 대한 대가, 혹은 교섭의 산물인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서 전쟁과 무력행사를 포기하고 국가의 교전권을 부인한’ 제9조가 뒤따르는 것이다. 일본국 헌법이 성립하기 위한 중요 조건이 일왕으로 상징되는 ‘국체 수호’와 이를 담보하기 위한 전쟁의 방기였다.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인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쇼와 천황과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부 총사령관의 만남

사카이는 책의 첫 문장을 ‘일본국 헌법은 아시아 태평양전쟁의 역사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일본 헌법이 독립국가에서 진행된 국민주권 표출이 아닌 패전 일본을 점령한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기괴한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일본국 헌법이 ‘하나의 제국적 국민주의(대일본제국)’가 파괴되고 다른 ‘제국적 국민주의(미국)’가 독점적인 보편주의로 자기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대 일본을 전시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과 같은 제국적 국민주의가 미국이 세계 패권을 차지한 전후 세계의 제국적 국민주의로 변이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을 점령정책의 협력자로”

그간 많은 일본 학자들은 천황제 존속과 평화조항의 존재를 일본과 당시 일본을 점령했던 미군정과의 교섭의 산물이라고 평가해 왔다. 천황으로 상징되는 국체 수호를 위해 노력한 일본이 강요 속에 마지못해 수용한 것이 평화 헌법이라는 우익의 논리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사카이는 ‘국체수호’를 간절히 바란 것은 전후 동아시아 점령에 책임을 져야 했던 미국의 정책 담당자였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맥아더: 일본 침몰에 관한 불편한 해석’이라고 소개되었던 영화 ‘종전의 엠페러’ (終戦のエンペラー, Emperor, 2012)는 이러한 미국과 일본의 교섭을 전후 미일 협력관계의 시작점으로 미화하여 보여준다. 영화는 미군정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그의 보좌관인 보나 펠라스 (Bonner F. Fellers) 준장이 일본의 전범 처리를 고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맥아더와 펠라스가 히로히토 천황을 만난 장면이다. 히로히토 천황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히로히토 천황을 처벌하고자 함이 아니며 천황의 힘을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실제로 1945년 9월 27일 이뤄졌던 맥아더와 천황의 이 회견을 기점으로 미국은 천황과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 통치를 확정지었다. 같은 해 10월 2일 펠라스가 작성해 본국 정부에 발신한 메모에는 천황을 점령 정책의 협력자로 규정할 것이 제안되었다.

이처럼 상징 천황이 일본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하는 미국의 ‘제국적 국민주의’의 자연스러운 의사결정이었음을 사카이는 서술한다. 일본국 헌법을 통해 확정된 상징 천황과 전쟁의 방기는 미국의 군사력 제공을 불가결하게 하였다. 일본의 보수파는 미국 점령 정권에 의해 주어진 ‘국체수호’에 만족해야 했다. 때문에 그들은 결코 ‘주어진 독립’의 마술에서 국민주의를 구출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기껏해야 그들의 민족주의는 ‘친미반소’의 민족주의, 즉 식민지 지배자를 동경하는 피점령민에 의한 국민주의라는 대단히 기묘한 민족주의였을 따름이라고 비판한다.

“일본은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

저자는 나아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독립을 획득한 일본이 사실은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동맹 또는 집단 안전 보장을 구실로 한 치외법권의 유지가 일상화되었고, 미군의 군사시설이 마치 ‘당연한’ 현실로 용인되었으며, 경찰 예비대로 시작한 자위대가 헌법 위반을 묵살하면서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서 정비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미국의 존재는 말하자면 투명화되어 이제 일본 국민 대부분은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문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이란, 국민국가인 미국의 주권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미국의 국민주의 간의 공범성으로 대표되는, 지구적인 규모로 확대된 상호의존 관계의 통괄 기구의 문제라고 저자는 보았다. 때문에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일본의 협조 체제는 미국의 제국적 국민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요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간 일본은 미국이 패권을 가진 이래 추진한 성공적인 점령과 근대화의 케이스로 언급돼 왔다. 사카이는 원저 발간 당시 국제적인 이슈였던 미국의 이라크 점령 과정에서 일본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그릇되었음을 지적한다.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천황을 유지시켰던 것에 비해, 이라크에서는 ‘이라크 국민’이라는 정치 통합을 위한 허구가 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완전 독립과 ‘잔여’(the Rest)

저자는 투쟁 없이 주어졌던 불완전 독립이 가져온 현상 중에 ‘잔여’의 문제에 천착한다. 그는 일본국 헌법이 상정한 ‘우리’를 ‘일본 민족’ 혹은 ‘국민’으로 규정하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저자는 ‘우리’의 확장을 위한 가능성을 ‘잔여’ (the Rest)라는 개념에서 제시한다.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잔여’들이야말로 통치의 제약이 없는 만큼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 헌법의 존재 의의에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잔여’의 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지속된 일본의 식민 지배 속에 급속히 증가했던 ‘일본인’이 패전과 함께 급속히 사라졌음을 의식해야 한다. 전후 일본이 일본 본토만으로 영토를 한정하면서 일본 내 거주하던 피식민지 출신의 ‘일본인’이었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헌법의 범위 밖에 놓여진 ‘잔여’가 되었다.

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규정된 국가 간 승인 체계는 지구 표면의 육지를 ‘국제세계’(international world)와 ‘잔여’(the Rest) 두 영역으로 구분했다. ‘국제세계’가 국제법에 의해 제어되는 세계라고 한다면, ‘잔여’에서는 국제법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 주민은 식민지 지배의 폭력에 노출되고 당연히 국제법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는 존재로 남겨져 왔던 것이다. 전후 일본은 미국이 설계한 동아시아 안보 체제 속에 ‘국제사회’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적 국민주의’를 통한 식민 지배 상태에 놓여있는 일본은 여전히 ‘잔여’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전후 일본의 역사가 자신의 잔여성을 부인하고 그 책임이 ‘국제사회’ 측에 있음을 강박적으로 주장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잔여’를 은폐한다는 것은 동일한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기 위해 이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들을 분리시켜 왔음을 뜻한다. 타자의 외침을 묵살하는 것은 그런 외침에 응하는 의무에서 자신들을 면제하는 일이다. 분리가 있는 곳에서는 외침에 응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응답의 의무라는 의미에서의 책임도 면제된다. 평화 헌법의 구조 속에 민족주의적인 국민주의를 양분으로 성장해 온 일본의 우익들이 전쟁 책임을 외면하고 부인하는 것은 분리를 통한 책임회피의 대표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정의가 희망의 시작

일본 헌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발화 주체와 응답의 문제에 주목한다. 영속 패전의 구조 속에 한정되어 왔던 ‘우리’를 ‘잔여’로 확장하는 것이 그 단초가 될 것이다. 저자는 국민이나 민족과 같은 인종주의와 관련된 사회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공동성’을 검토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이민자나 소수자와 같은 은폐되어 온 자들의 사회성에 기초하여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인이면서 미국 코넬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근대화와 민족의 동일성, 국민국가에서 진행된 제국적 국민주의를 연구해 온 저자 자신 또한 ‘잔여’로서의 감각을 예민하게 발휘할 수 있는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소 추상적이고 난해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잔여’와 ‘우리’를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을 지켜야 할 발화 주체와 이에 대해 응답할 책임이 있는 새로운 우리를 형성할 것을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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