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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기의 설계자들] “그가 없었다면 미국이 남미처럼 수십 개 소국으로 쪼개졌을 것” - 북미 분단 막고 단일 초강대국의 기초를 세운 에이브러햄 링컨

황동일 기획위원

2019.10.23

<편집자 주>

대전환기다. 냉전 70년 만에 탈냉전과 미국 단일 패권시대가 왔고, 그 이후 30년 만에 패권 질서 재편의 시기에 들어섰다. 여기에 4차 디지털 기술혁명이 표준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의 권력이동이 가로 세로축으로 교차하면서 세계적 수준에서 격랑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이런 대변동기에 야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전장(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되거나 식민지가 되거나 분단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미·중 패권 경쟁의 격화로 인해 커져 가는 지정학적 리스크, 강제징용자 문제로 빚어진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와 한·일 갈등 등이 한국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한다. 새로이 열리는 위기의 징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시대의 성패도 갈릴 것이다. 크게 보고 현명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사에는 전환기적 상황 속에서 국가를 일으켜 세운 거목들이 있다. 여시재는 그들로부터 이 대전환기를 헤쳐나갈 슬기와 지혜를 얻고자 한다.

이번 순서는 미합중국 16대(1861~1865)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링컨은 정적까지도 포용하는 통합의 리더십으로 우리에게도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링컨의 리더십 요체는 그렇게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대는 북미 대륙의 명운을 가를만한 대전환기였다. 우리로 치면 한국전쟁이라고 할만한 전쟁을 지휘한 뒤 지금의 미국을 설계한 사람이 링컨이다.

<링컨은?>

“27번의 실패와 단 한번의 성공”

링컨의 인생은 ‘대부분의 실패’와 ‘극적인 성취’라는 두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1809년 미국 중남부 내륙에 위치한 켄터키주에서 약 600에이커의 농장을 소유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링컨이 7살 때이던 1816년 법적 문제로 토지를 모두 잃었고, 그 2년 후인 1818년에는 어머니가 34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 와중에 학교도 약 9개월 밖에 다니지 못했고, 21살이 될 때까지 나무꾼 등 잡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22살의 나이에 비로소 독립한 링컨은 뱃사공, 가게 점원, 토지 측량기사, 우체국장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23살에 주 의회에 출마했지만 낙선하였고, 이듬해인 24살에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여 17년 동안 빚을 갚아나가야 했다. 29살에 주의회 의장직에 도전했지만 낙선했고 31살에는 대통령 선거위원 선거에서, 34살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다. 37살에 드디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39살에 다시 낙선했고, 46살에는 상원의원 선거, 47살에 부통령 선거, 49살에 상원의원 선거에서 모두 낙선하였다. 낙선 2년 후인 1860년, 51살에 나선 선거에서 마침내 미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런 그의 삶을 가리켜 누군가 “27번의 실패와 단 한 번의 성공”이라고 요약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생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천천히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뒤로는 가지 않는다”라고 술회했다.

1865년 4월 9일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4년여를 끈 남북전쟁이 드디어 총성을 멈추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865년 4월 14일 오후 10시 13분,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졌다. 그리고 9시간 후인 1865년 4월 15일 오전 7시 22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정치 인생을 요약할 만한 에피소드가 있다.

“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만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 여기 누워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세상은 바뀔지라도 이 사람은 온 역사의 재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제 그 이름 영원하라.”

링컨 내각에서 일했던 스탠턴 국방장관이 링컨에 대해 한 말이다. 앞은 링컨이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시절 때 링컨을 모욕하기 위해 한 말이었고, 뒤는 링컨이 암살을 당한 직후 한 말이었다. 그저 죽은 자에 대한 예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링컨은 그의 말대로 역사에 남았다. 링컨은 미국의 분단, 더 나아가 여러 국가로의 분열을 막았다. 생각해보라. 북아메리카가 지금의 미국과 캐나다의 대륙이 아니라 남아메리카 소국으로 쪼개진 대륙이었다면? 미국인 입장에서 링컨에게 진 빚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있겠는가?

<양재열 - 이광재 대담>

남북전쟁은 한반도의 6.25

미국은 언제부터 오늘날과 같은 초강대국이 되었을까? 영국의 식민지였고, 남북으로 갈려 전쟁까지 치른 미국은 언제부터 하나의 나라로 통합될 수 있었을까?

『에이브러햄 링컨: 제16대 대통령』을 쓴 영남대 양재열 교수와 여시재 이광재 원장이 만나 링컨의 리더십과 남북전쟁 시기 미국 사례가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에 대해 대담했다. 양 교수는 계명대에서 「1840년대 미국의 지역주의」로 박사 학위를 받은 미국 전문가로서, 특히 북부와 남부 간 정치경제적·지역적·인종적 이해관계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이에 따른 지역주의의 전개 양상과 해소 과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링컨의 정치와 리더십에 관해 연구했고, 『에이브러햄 링컨: 제16대 대통령』을 썼다.

USA 대 CSA의 대결

하나의 가정이 가능하다. 미국이 중남미처럼 29개 국가(유럽 여러 나라의 자치령까지 포함하면 30여 개)로 쪼개졌다면 이후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부질없는 가정이기는 하나 그런 위기가 150여 년 전 있었다. 실제 쪼개져 만 4년간의 전쟁까지 치렀다. 이때의 남북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유일 파워 미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세계사는 전면적으로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1861년 2월 4일, 미국 앨라배마 주 주도인 몽고메리에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아칸소, 텍사스, 플로리다 등 남부 11개 주의 대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4일간의 회의와 조율을 거쳐 2월 8일, 미시시피 주 출신의 전 상원의원인 제퍼슨 데이비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하는 ‘아메리카연합국(CSA,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건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1783년 9월 3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3개 주가 연합하여 건국한 ‘미합중국(USA, United States of America)’은 78년 만에 와해되고 미국 영토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섰다. 뒤이어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항 인근에 있는 섬터 요새를 CSA 군대가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The Civil War: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 연방정부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The War of the Rebellion, 즉 ‘반란’이다)’이 공식 발발하였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내전’이자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의 시작이자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협이 현실화하는 순간이었다.

남북전쟁은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단지 정치적으로 지연되고 봉합되어왔던 구조적 갈등이 일시에 터져 나온 필연적인 전쟁이었다. 미국은 독립 이전 영국 식민 시기부터 남부에서는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성행했고, 북부에서는 자영농과 가내 수공업, 그리고 상업이 발달했다. 이런 경제 구조의 차이는 자연히 서로 다른 경제적 이해관계를 낳았고, 연방정부의 경제 정책을 두고 북부와 남부는 처음부터 첨예하게 대립했다. 건국 초기에는 남북 간 세력 균형에 따른 타협과 절충이 비교적 잘 이루어졌으나, 영토 확장으로 새로 연방에 가입해 오는 주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 가입한 주에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과 북부 세력 모두에게 연방체제에서의 정치적 우세를 가름하는 사활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1819년 미주리 주가 노예 주로서 연방 가입을 신청하면서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남부는 당연히 미주리 주의 연방 가입을 찬성했지만 북부는 미주리 주가 연방의 일원이 되면 노예의 5분의 3을 투표권이 있는 인구로 계산하는 제도 때문에 연방 국회에서 노예 주 대표들이 너무 많아진다는 이유를 들어 미주리 주의 연방 가입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논란 끝에 미주리 주 연방 가입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앞으로 루이지애나 북위 36도 30분 이북에서는 노예제를 일체 금지한다는 내용의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져 일단 갈등은 봉합되었다.

연방 주도권 놓고 수십 년 갈등 누적

1845년 텍사스가 노예 주로, 1849년 캘리포니아가 자유 주로 각각 연방 가입을 신청하면서 다시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당시 휘그당 소속의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이를 이유로 연방을 탈퇴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무력으로라도 개입하겠다고 천명함으로써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으나, 1850년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의 타협안 제출에 의한 이른바 ‘1850년 대타협’으로 다시 봉합되었다. 대 타협안은 노예제 허용 여부는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되 기존 탈출노예법을 더욱 엄격하게 개정하여 남부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이에 따르면 탈출 노예를 도와주면 형사 처벌을 받도록 하고 탈출 노예는 주인이 당국의 영장 없이도 체포하여 끌고 갈 수 있도록 했다.

여전히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단지 봉합된 것일 뿐이었다.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이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부와 경제력은 물론, 정치권력과 대의명분 모두 북부로 쏠리기 시작했다. 북부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1850년 대타협에 따른 탈출노예법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노예들의 탈출을 부추기거나 독려했다. 자유노동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남부 주와 주민들의 의구심과 두려움 또한 중폭 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노예 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 갈등에 불을 지른 것이 1857년 이른바 ‘드레드 스콧 사건’과 이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이었다. 드레드 스콧은 미주리 출신 흑인 노예로 존 에머슨이라는 군의관이 그의 소유주였다. 에머슨을 따라 자유 주인 일리노이 주와 위스콘신 주를 다녀온 드레드 스콧이 노예 주인 미주리로 돌아와 자신은 이전에 자유 주에 살았기 때문에 그때 이미 자유민이 되었으며, 따라서 아직도 자신을 노예로 부리는 주인의 행위는 불법이라는 요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방법원을 거쳐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소송에서 흑인은 헌법상 연방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청구할 자격 자체가 없고, 노예는 헌법에 보장된 재산권의 일부로서 절대 보호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미국 내 여론이 분열되면서 노예제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신생 공화당이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 링컨이 전국적 유명 인사로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드레드 스콧 판결 직후인 1858년 일리노이 주 연방의회 상원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경쟁 상대인 유력 정치인 스티븐 더글러스를 상대로 드레드 스콧 판결에 대하여 더글러스가 취한 모호한 태도를 공격하면서 일약 유명 인사의 반열에 올랐다. 링컨은 상원의원 후보 수락 연설문을 통해 “스스로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어떤 주는 노예제를 고집하고 어떤 주는 이를 반대하는 한 우리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연방이 해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집이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분열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다”

일리노이 주 선거와 더글러와의 논쟁을 통해 노예해방론자의 대표 주자로 발돋움한 링컨은 1860년, 드디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연방의회 권력을 북부 주들이 장악하고 있던 차에 치러진 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은 18개의 북부 자유 주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15개의 남부 노예 주 중 9개에서는 아예 단 한 표도 받지 못했다. 이런 극단적 양극화 속에서 링컨의 당선이 최종 확정되자마자 지금까지 반연방주의의 선봉에 서 왔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맨 먼저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을 선언했고, 1861년 2월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바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연방을 탈퇴하여 미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독립국가를 결성하고 독자적인 헌법도 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주저하던 버지니아를 필두로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가 뒤를 이으면서 미국은 건국 84년 만에 공식적으로 분열되었다. 남부 연합에는 인구 9백만 11개 주, 그리고 북부 연방에는 인구 2천 2백만 명에 23개 주가 가담하여 연방이 두 개의 소 연방국가로 분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바야흐로 연방 대통령의 자격으로, 그리고 북부의 최고 지도자로서 링컨은 남북전쟁에서의 승리와 함께 남북 갈등과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된 노예 문제 해결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책무를 떠맡았다.

링컨의 대선 득표율은 39.8% 불과

“나의 정책이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의 제일의 관심은 연방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노예제를 허용하느냐 금하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만약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도 연방이 존속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방을 위해 모든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면 역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부는 해방하고 일부는 그대로 두어야 연방이 존속된다면 역시 또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예해방에 대한 링컨의 입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기사를 쓴 「뉴욕 트리뷴」의 편집국장 호레이스 그릴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링컨은 ‘연방 우선’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에 대해 양재열 교수는 “노예제에 대한 링컨의 생각은 20대 젊었을 때부터 대통령이 될 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링컨이 태어난 켄터키 주는 노예 주라서 링컨은 어렸을 적부터 당연히 노예를 보고 자랐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인간적으로는 노예들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겠지만, 직업 정치인으로서 링컨의 입장은 미국이 남북으로 쪼개져서는 앞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칫 남과 북 두 나라가 아니라 중남미처럼 여러 나라로 쪼개질 가능성이 너무 높다, 연방이 보존되지 않으면 여러 개 약소국으로 쪼개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서 노예제가 없는 북부에서 남부를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북부지역 주들의 일방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링컨의 대통령선거 득표율은 39.8%에 불과했다. ‘아메리카연합국(CSA,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에 들어간 주들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던 것이다.

“국기에서 별이 하나라도 줄어든다면
나는 죽어버릴 것”

링컨은 “우리 국기에서 별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죽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연방 분리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던 연방군의 섬터 요새를 남부연합군이 공격하자 즉각 전쟁을 개시했다. 현대 역사에서는 ‘내전’(The Civil War)이라고 부르고, 친 남부적 관점을 보이는 사람들은 ‘주(州) 간 전쟁’(War between the States)이라고 부르는, 미국 땅에서 벌어진 2번째 전쟁(독립전쟁에 이어) 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 전쟁인 남북전쟁의 개전이었다. 남북전쟁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북부의 승리로 끝났고, 이에 따라 미국은 ‘아메리카연합국’(CSA)가 아니라 ‘아메리카합중국’(USA)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대가는 비쌌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나 경험하게 되는 현대적 총력전의 양상이 비행기와 전차의 존재만 빼고 모두 총동원되었다. 그 결과 당시 인구 3000만 명 중 2%인 6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전쟁에서 진 남부 지역의 참상은 더욱 심했다. 전쟁으로 남부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파괴되었다. 노예 해방으로 흑인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와해되고 소규모 자영농으로 대체되었다. 남북전쟁 개전 당시 링컨의 역사적 소명이 전쟁에서 승리해 연방제를 물리적으로 지켜내는 것이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어떻게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남부 주들과 남부인들을 같은 미합중국의 국민들로 통합해낼 것인가였다.

통합론자 링컨 암살되자
강경론자들이 남부에 군정 강제

링컨은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종전 후에도 남부는 ‘적’이 아니라 언젠가는 하나로 합쳐져야 할 ‘통합’의 대상이라고 했다. 전쟁 전에는 노예해방 문제에서 일부 양보하더라도 연방의 통합과 보존을 우선시하는 어려운 정치적 입장을 선택했다. 그에게 분열된 미합중국은 “언젠가는 바로 서야 할 분열된 집”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후 처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을 때도 링컨은 일관되게 통합론자의 입장을 견지했다. 사실 남북전쟁은 영토 전쟁이나 이념적 차이에 기인한 격돌이 아니라 원래 하나였던 국가가 이해관계의 충돌로 둘로 분열되어 내전으로 비화했다가 다시 합친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후 처리 문제도 그만큼 복잡하고 미묘했다. 전후 정치적 노선에 따라 남부와 남부인에 대한 입장이 둘로 갈렸다. 다시 끌어안아야 할, 미국의 분리할 수 없는 일부라는 입장과 전쟁 책임을 물어 처벌하고 응징해야 할 전범이라는 입장이었다. 링컨은 루이지애나, 아칸소, 테네시 등 전쟁 도중 수복한 지역의 처리에 대해 지역 내 인구의 10% 이상만 연방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면 더 이상의 조건 없이 연방으로 복귀하여 새로운 주 정부에 자치권을 허용하자는 소위 ‘10% 안’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공화당 내 급진파들은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이 충성 서약을 하는 주에 대해서만 주정부 수립과 연방 재가입을 승인하는 내용의 ‘웨이드-데이비스 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링컨은 이 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1865년 초, 종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전후 처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일부 급진파들은 남부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여 남부 대농장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남부의 정치적 주도권도 해방된 노예들에게 대폭 이양하자고 주장했다. 링컨은 남부의 ‘이방인’인 북부인들에게 남부 통치를 맡기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남부 스스로가 재건과 연방 통합의 주체가 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링컨의 암살로 인해 급진파가 득세하면서 결국 남부지역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군정은 사실상 남부를 패전국이자 점령지로 간주하는 정치 행위였다. 군정 기간 동안 남부인은 연방 공직 진출이 원천 봉쇄되었으며, 일반 시민들의 경우에도 연방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참정권 등의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2년간 군정이 실시되면서 북부에 대한 남부의 원한은 깊어졌고, 정치적 이유로 인해 노예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면서 적어도 남부지역에서의 인종 문제 해결은 한 세기가 더 걸려야 했다.

미국 최초로 정부보증 법정화폐 발행
경제공황 복합위기 극복

남북전쟁이 미국과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은 크고 깊었다. 무엇보다 남북전쟁에 의한 북부의 승리와 연방의 유지, 보존으로 미국은 유럽에 의존하는 농업경제에서 탈피하여 세계적인 선진 공업국가를 거쳐 세계 최강대국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남북전쟁은 남부와 북부 간 지역분열이기도 했고, 노예제를 둘러싼 이념과 정치적 노선의 분열이기도 했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산업화된 북부와 농업 중심의 남부 간의 경제적 전환을 둘러싼 분열과 투쟁이었다. 링컨은 정치 입문 초기부터 운하, 철도 등의 대규모 물류 시스템 확충과 자국 내 핵심 산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 등 자국 산업에 대한 보호주의 및 중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으로 남북부 간 경제적 모순을 해소하고 미국 대륙을 단일한 경제권으로 통합하여 미국을 산업화에 기반한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할 계기를 마련한 대통령이었다.

정치적 업적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링컨은 경제 부문에서도 뛰어난 수완과 성과를 남긴 대통령이었다. 1857년, 미국에서 영업 중이던 영국계 대형 보험회사의 파산을 시작으로 미국 철도사업에 집중 투자했던 금융자본들의 파산이 잇달았다. 여기에 14톤의 금괴와 금화를 실은 배가 카리브해에서 태풍으로 침몰하면서 미국 금융시장에 일대 공포가 엄습했다. 미국 국채의 절반, 뉴욕 증시에 상장된 최우량 철도 주식의 26%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계 자본이 대거 월가를 떠나면서 미국 금융 시스템에 궤멸적 위협이 가해졌다. 미국 발 금융위기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까지 번지면서 세계적 경제공황 조짐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찰스 킨들버거(1910~2003)가 『광기, 패닉, 붕괴-금융 위기의 역사』에서 “1857년의 공황은 인류가 동시에 경험한 최초의 세계적인 공황”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엄청난 경제적 위기가 미국을 휩쓸었다. 지폐와 교환할 금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전쟁 리스크를 빌미 삼아 유럽 은행들은 이자만 20~30%를 웃도는 고금리를 요구했다. 뒤이어 1861년 남북전쟁까지 터지면서 링컨의 미국은 경제뿐 아니라 국가 안보 자체의 파국적 위기에 직면했다.

링컨은 단기 처방에서부터 중장기 전략 방안까지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먼저 링컨과 그의 내각은 금본위제 하에서의 금 부족 리스크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정부(재무부)가 보증하는 법정 화폐인 ‘그린백’ 4억 5000만 달러를 발행하여 정상적으로 유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린백 4억 5000만달러 어치는 미국 내 시장에서 금을 대체하면서 자금 사정을 순식간에 호전시켰다. 여기에다가 부분지급준비금제도를 통한 은행의 화폐 창출 작업이 더해져서 시중에 돈이 급격하게 풀렸고, 풀려나온 돈들은 군수산업이나 철도, 도로산업 등으로 흘러 들어가 북부의 전쟁 승리 및 전쟁 중 경제공황이라는 복합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국립과학원 만들어
유럽 과학기술 따라잡아

링컨은 단기 처방에 그치지 않았다. 전시였던 1862년 홈스테드 법을 발효시켰고, 1863년에는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을 설립하였다. 국립과학원은 산업화에 앞선 유럽의 과학기술을 따라잡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양재열 교수는 “링컨은 변호사에 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우리로 치면 ‘문과생’ 출신이었는데, 특허를 여러 건 출원했을 정도로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링컨은 비단 학술적 관심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립과학원을 만들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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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40에이커 땅 무상 제공
양질의 노동력 미국으로 흡수
‘아메리칸 드림’을 만든 정치인

미국에 적대적인 행동을 취한 적이 없고 5년 이상 거주한 21세 이상의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160 ~ 640 에이커의 미국 서부 미개척지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한 홈스테드 법은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등 전 세계 여러 국가들로부터 대량 이민을 촉진하여 양질의 노동 인력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활기에 찬 기회의 나라, 성취의 나라로 빠르게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광재 원장은 “산업혁명 후발 국가인 미국이 자꾸 첨단 지식과 기술을 지닌 기술자를 빼가려고 하니까 영국에서 기술이민금지법을 제정할 정도로 자국의 과학기술을 보호했다. 홈스테드 법이 발효되면서 대량 이민 물결에 사람뿐 아니라 최신 지식과 과학기술까지 같이 미국으로 밀려들어 오면서 미국이 빠르게 유럽 선진국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마침내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홈스테드 법의 의미와 효과를 분석했다.

정적을 전쟁 장관으로 기용
총력체제 가동 성공해 전쟁 승리

북부는 인구 수나 경제력뿐 아니라 군사력도 남부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전쟁 중반까지 북군은 좀체 승기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남부군에게 밀리기까지 했다. 링컨 대통령은 전쟁을 진두지휘할 전쟁(국방) 장관으로 야당인 민주당 출신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인 에드윈 M. 스탠턴을 호출했다. 내각 관료들은 물론, 공화당 인사들까지 나서서 링컨을 뜯어말렸다. 하필 반대당인 민주당 인사를, 그것도 링컨에게 ‘고릴라’라는 인신공격을 퍼부었던 인사를 연방의 존폐를 가름할 수도 있는 전쟁 장관으로까지 기용하느냐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링컨의 대답은 “스탠턴만 한 장관감을 데리고 오라, 그러면 그 사람을 쓰겠다”였다. 정적의 제안을 받은 스탠턴 또한 링컨에 대한 호의와 충성이 아니라 “오직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링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 끈끈한 팀워크를 유지한 가운데 드디어 전세를 뒤집어 전쟁에 승리했다. 남부군이 항복한 직후 링컨이 암살당하자 제일 먼저 링컨에게 달려가 제일 오래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이 스탠턴이었다. 링컨이 죽자 그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 여기 누워 있다.” 링컨의 스탠턴 발탁은 단지 탕평인사가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오로지 자질과 역량만을 본 실용적 인사였다. 그 결과 북부 총력체제가 본격 가동되면서 북부 연방군은 전쟁에 승리했고, 링컨 자신 또한 자신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사람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링컨 없었다면
미국은 여러 소국으로 분열됐을 것”

링컨은 미국을 자치주들의 느슨한 연대체에서 명실상부한 현대 국민국가로 탈바꿈시킨 대통령이었다. 링컨은 남북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분열을 막았고, 노예 해방을 통해 인종 간 분열을 막았으며, 탕평과 통합의 정치로 이념과 정치적 분열을 막았다. 그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 아래 모든 미국 국민들을 하나로 끌어모은 통합의 리더였다. 양재열 교수는 “통합 노력이야말로 링컨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고, 대한민국 사회가 배워야 할 점”이라면서 “링컨이 없었다면 미국은 여러 개의 중소 독립국가로 분열되어 오늘날과 같은 리더 국가는 절대 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정치·경제·지역적·인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갈가리 찢겨 있던 미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통일 후에는 미국이 어떻게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비전까지 제시했던 링컨의 ‘통합의 리더십’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가 링컨으로부터 꼭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밝혔다.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탕평과 통합의 리더십 ‘링컨’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양재열 영남대 교수가 말하는 링컨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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