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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 디지털혁명과 신계급사회 ③·끝] 왜 실리콘밸리는 ‘기본소득제’를 지지하고 독일 사민당은 비판적인가 - 이제 진보∙보수의 단선적 기준으로는 ‘새로운 규칙’ 못 만들어

김은환 (저술가)

2019.06.28

수저론, 헬조선, 사라진 개천 용 등 지금 한국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키워드들은 신계급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보인다. 부와 권력의 불평등은 심화될 뿐 아니라 고착화된다. 이제 초입에 들어선 디지털혁명은 이 불평등을 ‘1대 99’의 사회로 강화시킬 수도 있고 하기에 따라서는 근원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규명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우리 사회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도전 중 하나다. 이 도전이 갖는 의미를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게재순서>
1)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의미
2) 디지털 혁명의 미래와 그에 따른 우리 사회의 전망
3) 현 시점에서 취해야 할 대안 제시의 순서

필자 김은환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KAIST와 성균관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삼성경제연구소에 들어가 경영전략실장과 산업전략실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기업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기업은 경쟁의 주체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력의 주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2017년 이런 생각을 담아 ‘기업진화의 비밀’을 출간했고 ‘산업혁명의 주역들’ 출간을 앞두고 있다.


활 잘쏘는 사람이 재판 이기게 했더니
전쟁에서도 이겼다

한비자 <내저설> 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위나라 문공 시절 태수를 지낸 이회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공표했다. “시비곡직을 가리기 어려운 소송 사건에서는 두 사람에게 활을 쏘게 하여 맞힌 자를 승소로 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활쏘기 연습에 열중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 줄을 몰랐다. 그 후 진나라와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에는 다소 나이브하게 들리지만 메시지만큼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인센티브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성과∙인센티브의 조합이 다소 엉뚱했지만 그 효과는 적중했다. 더구나 모든 소송이 아니라 ‘시비곡직을 가리기 어려운 경우’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신중하고 정교한 측면도 있었다.

이것과 반대되는 사례도 있다. 서양의 코르셋이나 중국의 전족은 당시 여성의 미의 기준이 됨으로써 여성들의 건강을 크게 해쳤다. 청나라 말 과거제도는 당시 떠오르던 서학 등 실용적 학문과는 무관한, ‘사륙변려문’이라는 형식과 기교 위주의 글짓기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했다. 유통기한이 다 된 고전을 외우고 실생활과 무관한 글 솜씨에 매달린 관료들은 중국이 쇠퇴하는데 한몫을 했다. 이에 비하면 활쏘기를 기준으로 인센티브를 제시한 2천 년 전 전국 시대의 지혜가 얼마나 단순하고 직관적이고 건설적인지 모르겠다.

모든 게임에는 게임 자체와 그 게임 위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게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규칙을 정하는 게임이다. 축구장에서 누가 더 골을 많이 넣는가의 게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국제축구평의회(IFAB)에서는 또 하나의 경쟁이 치열하다. 경기장 못지않게 뜨거운 이 무대에서 수많은 규칙들이 끝없이 조율되고 있다. 이런 규칙의 제정은 은연중에 전술과 승부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

규칙 변경이 반드시 특정 팀에 이점을 주려는 음모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게 그러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규칙은 승패뿐 아니라 축구라는 게임 자체의 발전과 흥행에 영향을 준다. 축구 규칙의 역사는 한마디로 선수들이 골문을 밀집 방어하는 재미없는 수비축구를 견제하고 공격을 촉진하려는 역사다. 오프사이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오프사이드가 없었다면 축구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경기가 됐을 것이다.

하나의 축구 게임이 해당 시합의 승패를 결정한다면 규칙은 축구의 한 시대를 결정한다. 그것을 둘러싸고 관련자들이 양보 없는 한 판 승부를 벌인다. 규칙의 변화가 게임의 판도를 어떻게 바꿀지는 당장은 불명확하다. 그런 와중에 모두는 각자의 유불리를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다. 과거의 게임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게임 방식을 받아들일 것인가.

자유시장은 의외로 보수적이다

경제에서도 규칙이 중요한가. 당연히 중요하다. 일부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시장은 적자생존의 정글이 아니다. 시장은 정교한 규칙의 설계와 규칙 위반을 제재할 수 있는 물리력 위에서 존재한다. 시장에 대한 보다 적절한 메타포는 정글보다는 육상 종목의 트랙경기다. 안쪽 트랙이 바깥쪽 트랙보다 짧기 때문에 출발선은 경주로에 수직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그어진다. 400미터에 비해 1600미터는 기울기가 더 심해진다. 대충 그어서는 안되고 정교하게 그어져야 한다. 이러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시장이다.

얼핏 보면 바깥쪽에서 뛰는 사람에게 부당한 혜택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이런 규칙 없이 출발선을 곧이곧대로 긋는다면 모두 바깥 트랙을 기피하게 될 것이며, 안쪽 트랙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부작용들, 즉 반칙, 뇌물과 같은 부정부패, 또는 권한 남용에 의한 불공정 승부가 벌어질 것이며,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경우 바깥 트랙 경기자들의 보이콧으로 종목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시장의 규칙이란 시장 참가자들 간에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하지만, 실행력을 가지는 규칙 제정은 주로 정부의 역할이다. 이런 면에서 시장과 정부는 대체관계라기보다는 보완관계에 있다. 올바른 출발선 긋기가 트랙경기를 살리듯 올바른 규칙이 시장을 살린다. 정부는 국제축구평의회와 같이 게임 위의 게임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우리의 시장은 현재 어떤 규칙 하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닥쳐 올 전쟁에 유용한 활쏘기 능력을 평가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륙변려문의 현란한 문체를 평가하고 있는가?

자유 시장이야말로 인간의 창의성과 혁신을 자극하는 이상적인 체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권위적 독재 체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도전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연 시장이 만병통치약일까. 시장은 자원 배분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지만, 혁신을 촉진하는 도구가 되려면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자유방임에만 맡겨둘 경우 시장은 의외로 보수적이다. 마치 오프사이드 규칙이 없었으면 축구가 수비 일변도의 지루한 게임이 될 뻔한 것과 같다. 시장은 이미 성능과 품질이 익히 알려지고 검증된 상품들은 잘 받아들이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낯선 신제품에게 가혹한 곳이다. 역사적으로도 100개의 발명이 이루어지면 5개만 시장에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성공 위해선 혁신에 특혜 줘야

혁신이란 그 자체 낯설고 불편할뿐더러, 기존의 산업 및 인프라의 대대적 변화를 요구한다. 고래기름으로 켜던 가스등이 전구로 바뀔 때, 그전까지는 생각도 못 했던 발전소, 송전소, 변전탑이 요구되었다. 자동차의 등장은 도로, 주유소, 신호등과 교통규칙이라는 새로운 인프라를 요구했다. 시장에는 이러한 것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인위적인 규칙의 재조정과 인프라 건설이 없었다면 자동차는 마차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혁신의 버전 1.0은 기존 제품 버전 10.0에게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맨 바깥쪽 트랙의 선수가 똑바른 출발선에서 달려 안쪽 트랙 선수를 이길 수 없는 것과 같다. 혁신에 대한 특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신기술에 대한 거부와 기존 체제에 대한 옹호는 늘 기존의 균형, 즉 현상 유지를 지향했다. 이를 깨뜨리려면 다소 예외적이더라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증기기관의 운명은, 제임스 와트에 대해 발명 특허 기간을 특별히 두 배로 연장해 준 입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당시의 자유주의적 정치인이었던 에드먼드 버크는 특허 연장 시도를 자유시장 정신의 훼손으로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혁신에는 어느 정도의 우대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는 매초 매초 속삭인다. 나는 이미 과거’ - 보들레르

플랫폼경제에 특혜, 미국의 반독점 철학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 아마존을 위시한 플랫폼 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많은 기존 업종과 기업들이 무너졌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최근까지는 아마존에 대한 반독점 시비를 제기하지 않았다. 독점의 여부를 한 기업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니라 가격, 그리고 소비자의 이익으로 보는 미국의 규제 철학이 그 중요한 원인이다. 경쟁을 할 때보다 독점일 때 가격이 더 하락한다면 이를 규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장 티롤은 양면시장 이론을 발표하면서 독과점을 판단하는 일반적인 기준을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양면시장은 교차 네트워크 효과, 즉 예를 들면 데이팅 플랫폼에서 여성 가입자가 많아지면 남성 가입자가 따라 늘고, 이것이 역으로 다시 여성을 증가시키는 선순환 관계를 보인다. 이 경우 플랫폼 사업자가 네트워크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여성에게는 가입비를 무료로 한다고 해도, 이것을 약탈적 가격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면 시장 기업에 적용되는 규칙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아마존의 최저가 전략, 구글의 무료 검색서비스 제공은 모두 약탈적 가격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엄격한 규제를 적용했다면 플랫폼 기업의 부상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보∙보수의 일차원적 사고로
시장규칙을 디자인하는 것은 불가능

한강의 기적을 달성하는 동안 우리는 늘 경기장을 뛰는 감독과 선수였다. 규칙은 주어진 것이었고 우리는 ‘더 높게 더 멀리 더 빠르게’에만 매진했다. 이런 외골수의 경쟁은 이제 한계에 부딪쳤다. 이제는 국제축구평의회와 같은 규칙 제정의 게임, 즉 게임 위의 게임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문제는 이 게임이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역에서는 기존의 보수, 진보의 진영 논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이분법적 사고로 규칙을 좌우로 나누려고 해도 규칙의 영역은 일차원적이지 않다. 시장과 정부가 대체 관계가 아니라 보완 관계가 되면 벌써 정부 주도, 시장 주도의 이분법이 맞지 않는다. 올해 초에도 시장 중시를 표방하는 보수 정당이 포털을 규제할 법안을 제안하고 진보 정당이 이를 비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 국민에게 무상으로 일정 소득을 제공하는 ‘기본소득제’는 강력한 사회복지정책처럼 보이는데 시장의 대변자인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이를 지지하는 반면 독일 사민당은 비판적 논평을 내놓았다.

보수와 진보라는 기존의 구분법은 새로운 산업과 경제의 복잡성, 입체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제시한 동굴 속 죄수의 우화가 떠오른다. 죄수들은 실체를 보지 못하고 불빛에 비친 그림자만을 본다. 실제로는 총천연색의 입체적인 이데아의 움직임을, 죄수들은 오직 평면 위의 흑백 그림자로만 인식한다.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 Ricardo Gil Lavedra, July 30, 2018, “Plato and the Abortion Debate”, The Bubble

정부는 시장을 혁신의 장으로 만들
과감한 규칙의 변화 시도해야

기존의 재화와 서비스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정하기 위해서라면 시장은 지금 그대로라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혁신을 촉진하는 혁신 친화적 시장이 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래는 실체가 없는 뜬구름 같고 현재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이제 시장은 실험실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사업가들이 신제품과 신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하는 곳이자, 동시에 시장의 규칙이 어떻게 되어야 이러한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질까를 실험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실험 위의 실험인 셈이다. 기업, 투자자, 컨설턴트, 경제학자 등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두 참여해야겠지만, 역시 핵심 책임자는 정부다. 정부가 가장 고도의 고차원적인 실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정과 질서를 중시하는 관료와 공무원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주카토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연구한 결과 성공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정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부가 위험 감수적인 혁신의 후원자, 더 나아가 시장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계 부품의 표준화, 비행기의 발명, 컴퓨터의 발전 등등이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정부의 과감한 결단으로 한계를 극복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가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무사안일, 복지부동으로 후퇴할 수 있던 관료와 공무원들이 놀라운 기업가정신을 발휘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마주카토는, 정부는 안정, 민간은 혁신이라는 역할 구분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한다. 정부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적 행보를 보이는 것이 어색하게 들리지만, 사실 공무원은 신분이 보장되고 선출직은 임기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실적이 나빠지면 언제든 쫓겨나는 경영자에 비해 훨씬 더 안정된 상황이다. 도산과 해임에 상시 위협받는 민간 부문보다, 정부가 보다 근본적인 혁신을 시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규칙 변경의 이슈를 제기하고 숙의하고 시도해야 할 때다.

정부는 시행착오를 범할 용기 가져야

현재 진행되는 플랫폼 관련 논란은 섣불리 끼어들기 힘들 정도로 첨예하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 상황이야말로 규칙의 관리와 중재가 절실하다. 당사자들끼리 죽느냐 사느냐 격돌한 후 조용해지면 그때 가서 뒷수습하겠다는 것은 책임있는 정부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앞에서 ‘실험’이라고 표현했듯이 지금은 누구도 정답을 모른다. 상황을 한 방에 정리할 솔로몬의 지혜란 아쉽게도 현실에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행착오를 범하고 그에 책임을 질 용기다.

현재 한국 경제의 플랫폼화가 지지부진하다. 시장 경쟁에만 맡겨두면 저절로 혁신이 꽃 피는 것이 아니다. 경제와 산업에 관한 규칙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다. 어렵게 성장한 플랫폼 대기업을 기존의 대기업과 똑같은 규제의 틀에 넣을 것인가. 기존 법규를 엄격히 적용하여 공유경제 서비스를 억제할 것인가 등등...

정책 추진자로서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존 규칙에 신경제를 노출시키면 그것은 혁신의 맥을 끊게 될 것이다. 물론 기존 규칙을 믿고 활동하던 경제주체들이 입을 타격도 걱정된다. 트랙 경기 출발선처럼 정교한 각도를 유지하며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각도가 잘못 그어져 때로는 때로는 엄청난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보지 않고서는 답을 알 수 없다.

이제 게임 도중 규칙이 끊임없이 바뀌는 시대

현재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단순히 불경기나 기존 경쟁력 저하로 보고 단기 대책에만 몰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IT가 주도하는 기술혁명은 변화를 일상화시켰다. 이제 모든 게임은 게임 도중 규칙이 변하는 게임이다. 옆을 보지 못하도록 눈가리개를 쓰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자세로는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 보들레르의 <시간>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현재는 매초 매초 속삭인다. 나는 이미 과거” 우리의 현재를 살아가려면 미래에 대한 감각이 꼭 필요하다.

산업과 경제가 송두리째 바뀌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경제주체들이 기존의 경쟁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모두가 기존의 게임에 매달릴 때, 정부 역시 규칙을 변경할 근거가 없다. 모두가 골문 앞을 지키는 지루한 수비축구를 선수들도 규칙 위원회도 바꿀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종목의 폐지이다.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수 있다.

진보∙보수의 쇠사슬 끊고 동굴에서 나와야

아직 실망하고 좌절하기에는 이르다. 지난 편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3차 산업혁명의 우등생이고 모두가 인정하는 IT 강국이다. 이런 강점은 새로운 게임에 적합하지 않고 약점으로 전환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새로운 시대의 무기가 될 만한 강점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하버드 경영대학원 개리 피사노 교수의 ‘창조적 건설(Creative Construction)’의 개념은 흥미롭다. 피사노는 창조가 파괴와 항상 동반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대기업이 무너져야 플랫폼 경제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조직과 체계적 관리 엄격한 규율은 플랫폼 경제에서도 여전히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이 유력한 플랫폼 기업으로 매끄럽게 변신한 사례가 드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입증된 것은 아니다. 대기업 중심 경제인 한국이 그러한 대표적 성공 사례를 창출하지 말란 법이 없다. 기업은 가장 강력한 경쟁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 낡은 것에 집착할 여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업이 과거 성공 방식에 매달려 변혁을 주저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규칙이 아직도 너무 견고함을 뜻한다.

정부는 기업의 변신 에너지를 작은 규칙 변화로도 점화할 수 있다. 이때 정부에 호소하는 두 개의 목소리가 있다. 기존 성공 방식, 기존 경쟁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소리와, 미래를 바라보는 혁신의 소리가 그것이다. 어느 소리를 따를 것인가. 그것은 사안별로 건건이 따져봐야 하는 어려운 문제다. 기업친화적 정책을 일의적으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창조적 건설자’ 기업과 ‘지혜로운 규제자’ 정부의 파트너십이 절실하다. 진보∙보수의 쇠사슬을 끊고 동굴을 나와 미래 혁신의 입체적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경제성장도 가능하고, 1 대 100이라는 지속불가능 사회로 가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힘겨운 관찰과 분석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이분법적 사고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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