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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브리프] 국제질서의 정치에서 바라본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위치와 발전 방안

관리자

2017.12.13

프로젝트: 변환기의 금융질서와 미래 금융
제목: 국제질서의 정치에서 바라본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위치와 발전 방안
저자: 이용욱 (고려대)
No.2017-067


여시재 ‘변환기의 금융 질서와 미래 금융’ 프로젝트 연구팀에서는 지역 및 세계 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금융 질서의 현황을 분석하고, 지역 금융 질서의 유지를 위한 동북아 각국의 협력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통화체제의 변환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의 전략 구상합니다. 그리고 남북한 경제 협력을 염두에 둔 장기적인 통화정책의 모색하며, 나아가 디지털 시대의 금융의 존재 양식과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서론

국제정치는 질서경쟁의 장이다. 현대국제정치의 근간인 주권, 국제법, 다자주의 등 이 모두 근대유럽국제체제에서 비롯됐다. 19세기 유럽 팽창의 세계사적 중요성은 유럽지역의 국제질서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냉전도 질서전쟁 이었다[1]. 21세기에 있어 중국의 부상 역시 국제질서 논의가 그 중심에 있다. 중국의 부상이 기존의 자유주의질서를 변화시킬 것인지 여부가 논쟁에 대상이다[2].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면 중국의 부상이 갖는 국제정치적 의미는 크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시대”라는 문구의 내용은 “동아시아가 국제질서를 새롭게 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에 다름 아니다[3].

질서는 제도를 통해 구현된다. 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는 3대축인 IMF(금융), World Bank(개발), WTO(무역)로 작동하고 있다. 국제질서는 제도를 만들고 제도의 변화가 국제질서가 바뀌고 있음을 드러낸다. 국제제도(International Institutions/Regimes)의 성립, 발전, 변화는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국제사회의 규범, 특정 제도의 기능적 필요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물들이다[4]. 유럽연합을 비롯한 지역주의의 대두 역시 특정 공간의 제도화이다. 특히 지역주의에 수반하는 제도화는 탈제도화와 재제도화의 성격을 동시에 띤다. 탈제도화란 글로벌 제도적질서의 현상변화를 역내에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재제도화는 역내 규범과 기능적 필요에 따라 국가 간 전략적 협상을 통해 지역거버넌스를 위한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동아시아는 21세기를 리드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동아시아는 역내외에 새로운 제도의 창출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서경쟁”이라는 맥락에서 본고는 동아시아 금융협력을 논의하고자 한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이후 발전해온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그 협력의 폭, 깊이, 지속성 등에 있어 가장 성공적인 역내 제도적인 협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많은 제도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탈제도화와 재제도화의 측면에서 아직 미완이다. 동아시아 금융협력이 “동아시아의 21세기”라는 명제에 함의하는 바는 “제도 구성 능력”이다. 가장 대표적인 동아시아 역내 협력도 그 제도적 완결도가 낮다면 동아시아가 세계질서를 개혁하거나 혹은 재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간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진행 중이다. 따라서 섣부른 예단은 피하여야겠지만 높은 수준의 탈제도화와 재제도화를 위한 비판적 분석은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미래는 물론 세계정치무대에서 동아시아의 가능성을 제고하는데 필요하다.

본고는 다음과 같이 진행한다. 먼저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여타 지역에서 제도화된 지역금융협력의 발생 배경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현재 동아시아 금융협력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도전을 조망한다. 다음으로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제도적 발전 현황과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재도약을 위한 중단기적 과제를 제시한다. 지면 관계상 동아시아 지역금융안전망인 치앙마이이니셔티브에 한정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금융협력이 높은 수준의 탈제도화와 재제도화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정책방향을 논한다. 특히 전 세계에 동아시아가 새롭게 제시할 수 있는 금융거버넌스의 제도적인 틀과 규범에 대한 비전공유를 강조하며 마무리한다.

지역금융안전망의 역사적 발전과 기로에 선 동아시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이래도 지속되어 온 신자유주의 경제운영원리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가지 흐름을 창출하였다(이용욱 2015, 262-263). 첫째, 무역, 금융, 투자, 통화의 탈국경화(자유화, 탈, 민영화)에 따른 국가 경제간의 민감성과 취약성의 확대이다. 둘째, 빈번한 금융위기의 발생이다.[5]. 셋째, 이러한 금융위기의 대응방안으로 지역금융안전망의 출현인데, 이는 글로벌 금융안전망인 IMF와는 별도로 지역차원에서 금융위기 예방과 금융위기시 금융위기 관리와 신속한 긴급구제금융 제공을 목적으로 한다.

지역별 금융안전망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유럽의 경우, 2010년 유럽 국가부채 위기를 계기로 유럽금융안정기금(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 EFSF)을 발족시켰는데 EFSF가 확대되어 유럽안정메커니즘(European Stability Mechanism: ESM)으로 발전하였다. 2017년 3월 독일 재무장관인 Wolfgang Schäuble이 기존의 ESM의 기능을 확대한 유럽통화기금(European Monetary Fund)의 출범을 제안하면서 유럽은 본격적으로 독립적인 자체지역금융안전망 구상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중동에서는 아랍통화기금(Arab Monetary Fund: AMF)을 1976년에 출범시켰다. 남미에서는 1989년 Latin American Reserve Fund(Fondo Latinoamericano de Resevas: FLAR)가 작동 중에 있는데 FLAR의 전신은 1978년에 출범한 Andean Reserve Fund이다.

동아시아에서는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직간접적으로 함께 경험한 아세안+3를 중심으로 1998년 이후 금융협력을 지속하여 왔는데 2000년 출범하여 2010년에 다자화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hiang Mai Initiative Multilateralization: CMIM), 2002년 시작된 아시아채권시장 이니셔티브(Asian Bond Market Initiative: ABMI)가 제도적 협력의 주요 결과물이다.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경우 1997년 9월 일본이 제안한 아시아통화기금(Asian Monetary Fund: AMF)이 단초가 되었다. 일본의 AMF 제안은 미국, 유럽, 중국 등의 반대로 무산된 이후 1998년 ‘신미야자와 구상’을 거쳐 1999년 이래 ASEAN+3의 협력구조를 갖추고 발전해 왔다.

2013년 이후 G20와 IMF의 주도로 글로벌과 지역차원의 금융안전망 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최상위 포럼으로 G20가 출범되었는데, G20는 출범 초기 그 핵심 역할을 글로벌 금융위기의 재발방지 방안 마련과 이와 관련된 금융규제 개혁 등으로 제시하였다. G20 정책공조의 틀 안에서 IMF는 2013년 이후로 글로벌 금융안전망인 IMF와 지역금융안전망들 간의 협력 담론을 제시하며 추진하여 왔다. IMF가 지역금융안전망들과의 정책공조를 추진하는 이유는 금융위기 예방과 대처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이는 것에 있겠지만, 지역금융안전망들의 등장이 가져 올 IMF 위상 축소의 위기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IMF 입장에서는 IMF가 주도하여 글로벌과 지역차원의 금융안전망 협력의 구도를 고안하여 선점하는 것이 향후 IMF의 입지에도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과 지역차원의 금융안전망 정책공조는 역설적이게도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당위성과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통해 독자적인, 즉 IMF의 구속에서 벗어난 역내 금융안전망(CMIM)의 필요성과 역내 자본시장 발전(ABMI)을 통한 안정적인 자본의 공급과 흐름을 목표로 하여왔다. 동아시아의 입장에서도 IMF와의 정책공조는 필요하지만, 현시점의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수준을 볼 때 IMF와의 정책공조는 그 조건과 구조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된다. 양날의 검이 함축하는 부정적인 가능성은 다름 아닌 동아시아의 금융협력이 결국 IMF의 주니어 파트너가 되어 운영되는 것이다.

자세히 후술하듯 아세안+3은 지난 20여 년간 지속적인 금융협력을 통해 일정수준 이상의 역내 금융협력의 제도적 발전을 이루어 냈으나 아직 독립적인 역량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적인 예로 역내금융안전망인 CMIM의 IMF 연계비율을 들 수 있다. 현재 CMIM의 IMF 연계비율은 70%인데, 이 의미는 동아시아 역내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였을 경우 CMIM가 IMF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긴급구제금융의 규모가 CMIM 총 준비자산의 30%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세안+3이 IMF와의 정책공조를 주도적으로 진행하여 협력의 패턴을 견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IMF의 대안으로서 지난 20여 년간 아세안+3의 포맷으로 발전해 왔는데, 이제 다시 IMF 주도의 글로벌 안전망에 편입되는 역설에 봉착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역량강화가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요청된다.

동아시아 지역금융안전망의 제도적 발전 현황과 과제들

1. 현황

동아시아 역내 금융협력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6]. 먼저 CMIM인데, CMIM은 동아시아 역내 금융위기 예방과 금융위기 시 신속하고 효과적인 금융위기 관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음으로 ABMI를 들 수 있는데, ABMI는 역내 자본시장발전 방안으로 동아시아가 해외자본과의 거래과정에서 겪는 이중불일치(환율과 만기 불일치)를 완화하고 동아시아 자본시장을 발전시켜 동아시아 역내 자본이 역외로 유출되어 역내도 다시 환류 하는 구조를 탈피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공동통화 구상인데, 이 논의는 2006년 시작하였으나 2010년 유럽 금융위기에서 나타난 유로화 체제의 문제점들로 인해 큰 진전 없이 사실상 장기적인 과제로 남게 되었다.

CMIM(CMI)의 제도적 발전 현황은 다음과 같다. 아세안+3은 2000년 양자간 스왑 협정을 기초로 한 CMI를 출범시켰는데 총 스왑 규모는 170억 달러였으며, 이후 양자 스왑규모는 계속 확대되어 CMI가 다자화 되기 직전인 2009년에는 900억 달러에 달하였다. CMI의 최초 IMF 비연계 비율은 10%에 불과하였는데, 2005년 20%로, 2012년 30%로 증가한 이후 현재까지 30%로 변화가 없다.

아세안+3은 CMI 다자화에 대한 논의를 2006년 연례 재무장관회의에서 시작하여 2007년 일본 교토회의에서 다자화에 방점을 둔 “포스트 치앙마이 구상”을 내놓으며 구체화 한 이후 2009년에 인도네시아 발리회의에서 CMI 다자화(CMIM)를 최종 합의하였다. 아세안+3은 CMIM의 운영을 위해 총 기금규모(1200억 달러; 2012년 이후 2400억 달러), 분담금 배분(일본, 중국 각 384억 달러, 아세안 238억 달러, 한국 194억 달러), 투표권 배분(일본, 중국, 아세안 각 28.4%, 한국 14.8%), 기금운영형태(분담금의 납입이 아닌 각 회원국 중앙은행에 분담액수를 약속어음 방식으로 보관), 긴급구제금융 지원여부 의결방법(회원국의 3분의 2 찬성) 등의 합의를 이루어냈다[7]. CMIM은 공식적으로 2010년 3월 24일에 발효되었고 2018년 협정문 정기점검과 개정을 앞두고 있다[8].

이와 함께, CMIM의 자매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ASEAN+3 거시경제조사기구(ASEAN+3 Macroeconomic Research Office: AMRO)의 제도적 발전도 빼놓을 수 없다. ASEAN+3은 역내 거시경제 감시기능(Surveillance)과 CMIM의 원활한 작동(긴급구제금융 조건 등 구제금융 패키지 도출)을 돕기 위해 AMRO를 싱가포르에 설치하여 2011년 5월 출범시켰다. AMRO는 CMIM 체제에서 느슨한 형태로 운영되었던 기존의 거시감독 메커니즘인 “경제 및 정책 대화”(Economic Review and Policy Dialogue: ERPD)를 보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세안+3는 2013년 5월 AMRO를 국제기구화하기로 합의하였는데 회원국들의 국내 인준 과정을 거쳐 AMRO는 2016년 2월 국제기구로 정식 발족하였다. 이에 따라 AMRO는 동아시아에서 역사상 최초로 금융부분에서 국제기구지위를 가진 지역협의체로 자리매김 하였다.CMIM의 IMF 비연계 비중 확대에 있어 AMRO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세안+3은 2000년 CMI의 출범 당시부터 CMI의 IMF 연계비중에 관해 회원국들 간에 이견이 있었는데 IMF 연계비중을 역내 지역경제 감시기구의 발전에 따라 줄이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2. CMIM의 탈제도화와 재제도화를 위한 중단기 과제

CMIM의 향후 중단기적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2018년 협정문 개정을 앞둔 CMIM의 경우, 개혁과제의 핵심은 CMIM의 IMF 비연계 비중의 확대이다. 현재 비연계 비중인 30%에서 2018년에 50%로 높이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0% 비연계 비중은 CMIM의 독자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숫자”이기도 하지만 아세안+3이 금융위기 시 활용할 수 있는 독자적 가용자산의 확대를 기능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아세안+3이 2017년 40%로의 비연계 비중 확대에도 합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비연계 비중 확대에는 상당수준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 2018년 CMIM 협정문 최초개정이라는 기회를 십분 활용할 필요가 있다. CMIM의 50% IMF 비연계 비중은 향후 아세안+3이 IMF와 글로벌 금융안전망 정책협력 논의를 진행할 때 아세안+3의 입지를 넓혀줄 것으로 기대된다.

CMIM의 기금운영형태도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CMIM 기금은 납입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회원 각국이 분담금을 자국 중앙은행에 약속어음 형태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금융위기 시 신속하게 투입될 준비자산이 부재하다. 따라서 CMIM의 기금운영이 선납기금(Paid-in Funding)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금융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경우 초기 대응에 매우 유리하다(박영준 2014). 현재 세계 각 지역에서 운영되는 지역금융안전망들 중 선납기금을 갖추지 못한 것은 CMIM이 유일하다. 가령 유럽의 ESM는 총 펀드규모가 5000억 유로이며 이 중 약 800억 유로가 납입되어져 있다.

2012년 2400억 달러로 확충된 이후 현재까지 그대로인 CMIM의 기금규모도 확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3의 경제규모에 비해 2400억 달러가 충분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CMIM의 IMF 연계 비율은 더더욱 CMIM의 유동성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아세안+3은 CMIM의 발동절차, 실행 조건 등을 AMRO와 협력하여 구체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 시 CMIM과 IMF의 협력방식이 “선 CMIM 독자적 지원, 후 IMF 연계지원(추가 소요 발생 시)”로 전환하는 경우 이에 대한 사례별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AMRO의 경우 AMRO가 역내 거시경제 감시기능 강화와 CMIM의 원활한 작동을 돕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직의 확대와 연구역량 강화가 요구된다. 특히 AMRO의 존재 목적이 IMF와 경쟁할 수 있는 거시경제 감시체계를 확립하고 아시아 경제의 특수성에 기반한 독자적인 거시경제 평가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라고 볼 때 AMRO의 역량강화는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향방과도 직결된다. 장기적으로 AMRO를 CMIM의 사무국으로 전환하는 것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9].

3. 비전공유를 통한 재도약과 새로운 금융질서 창출

상기한 CMIM의 역량강화를 위한 중단기 과제는 어떻게 완수 될 수 있을까? 위에 제시된 중단기 과제의 완수는 CMIM이 자율권을 가진 독립된 지역제도로 안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다. 다자기구의 제도적 발전은 기본적으로 회원국들의 협의, 협상, 동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CMIM의 제도적 발전 방향, 폭, 속도 등에 있어 아세안+3 사이의 이견도 극복되어져야 될 대상이지만, 동아시아 역내 안보, 영토문제, 민족주의 등 외생변수로 인한 소극적 협력(혹은 충분한 협력의 부재)이 난관이다. 기실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제도적 발전은 2011-2012년 이후에 정체되어 있다. 전술한 CMIM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다른 축인 ABMI에서도 2012년경을 기점으로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없다. 동아시아가 애초부터 안고 있는 공유된 가치의 부재, 상이한 정치시스템, 불균등한 경제발전 수준, 불안한 안보구조 등을 고려해보면 지금정도의 협력의 성과를 이루어낸 것만 해도 적지 않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고무적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라는 지역공간의 한계를 지적하는 자조적인 평가이다.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은 결국 동아시아 금융협력이 지향하는 목적에 달려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아세안+3이 당초대로 탈제도화와 재제도화를 통해 동아시아 경제현실에 맞는 역내금융안전망을 구축하려한다면 현시점에서 무엇이 필요할까? 중국과 일본의 리더십 경쟁의 선순환, 한국과 아세안의 가교역할, 회원국 간의 신뢰 제고, 필요 재원 확보, CMIM과 AMRO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한 전문성 제고 등 다양한 요인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하겠지만 역시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지향점 문제로 돌아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세안+3이 공유하는 궁극적 지향점이 없다면 여러 제약조건들을 극복할 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 반대로, 지향점 공유는 제약조건들을 함께 풀어가야 하는 도전으로 인식하게 하여 협력의 당위성과 지속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지향점으로 전 세계를 향한 새로운 금융거버넌스 모델과 규범의 창출을 제시한다. 아세안+3이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목표를 단순한 “제도적 생존” 차원을 넘어 다른 지역의 금융협력이 참고하는 모델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국제질서차원의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후술하듯, 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현시점의 동아시아 금융협력에 이미 그 단초가 내재한다. 201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쉴러(2011)가 주창한 “금융민주화”(Democratizing Finance)는 아세안+3이 동아시아 역내 실현을 통해 글로벌 금융거버넌스의 대안 규범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 역시 기존에 논의되었던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당위성에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동아시아는 새로운 금융거버넌스 모델과 규범의 창출을 통해 국제경제질서 차원의 제도경쟁을 규칙준수자가 아닌 규칙제정자로서 주도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먼저 지역금융협력의 모델 제시이다. 앞서 논의한대로 글로벌 금융거버넌스는 중앙집권화와 지역화/분권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여러 숙제에도 불구하고 CMIM(지역금융안전망)과 ABMI(지역자본시장 발전)의 조합인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지역금융협력 중 최선두에 서있다. 가령 CMIM은 중동의 AMF나 남미의 FLAR 보다 뒤늦게 지역금융안전망으로 출범하였지만 그 규모나 AMRO 설립을 비롯한 제도화의 수준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 특히 지역금융안전망과 지역자본시장의 병행발전 모델은 아직까지 다른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병행발전 모델은 지금까지 어느 지역에서도 시도조차 된 적이 없는 참신성이 있다. 따라서 CMIM+ABMI 결합모델은 성공여부에 따라 지역금융협력에 새로운 모델로 전 세계에 제시될 수 있겠다.

그러나 최근 유럽은 CMIM보다 높은 수준의 지역금융안전망인 EMF 출범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지역금융안전망 출범 구체화와 함께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정체되면서 미래의 동아시아는 또 다시 유럽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하는 위치로 전락할 수 있다. 유럽은 이미 EMF가 IMF와는 별도로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EMF는 현재 작동 중인 ESM을 흡수하고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데 총 재정규모도 CMIM을 압도할 전망이다. 가령 유럽의 ESM는 현재 총 펀드규모가 5000억 유로이며 이 중 약 800억 유로가 납입되어져 있다. 약속어음 형태로 운영되는 CMIM의 2400억 달러와는 질적으로 다른 제도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20년 역사의 동아시아 금융협력이 갓 출범한 유럽의 지역금융안전망 제도를 참고하며 미래의 발전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면 아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아세안+3은 2018년 CMIM 개정 등을 통해 CMIM+ABMI 결합모델의 글로벌 경쟁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지역금융협력의 새로운 틀을 구축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금융거버넌스 대안 규범 역내 실천과 글로벌 확산이다. 국가 간의 협력에 있어 규범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규범, 즉 “사회집단 내부에서 공유되는 행동 규칙”은 독립변수로서 사회집단의 정체성 규정을 통해 집단 정체성에 적합한 정책을 구성원들이 추구하도록 한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오스트롬의 공유자원 연구가 하나의 예시이다. 사회규범은 “공유지의 비극”을 정부 개입 없이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조정해 공유지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두 번째는 정책비전의 매개로서 규범의 역할이다. 규범은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공유된 가치는 정책비전을 형성하게 한다. 가령 인권규범은 비전통적 안보이슈에 안보가치를 창출하여 인간안보라는 정책비전을 산출해 낸다. 규범은 새로운 정책비전의 창출을 통해 구성원들이 새롭게 도전할 공동목표를 설정하게 한다. 이를 통해, 규범은 국가 간 협력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규범의 작동방식은 구성원들 간의 합의를 통한 공유, 실천이다.

본고가 동아시아 금융협력 역량강화를 위해 제시하는 규범은 “금융 민주화”이다. 이 개념은 쉴러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그 정의는 단순명료하다. 쉴러는 “금융민주화”를 “금융기법을 일반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10]. 다시 말해 금융이 금융을 위한 금융이 아닌 일반사람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쉴러는 금융 민주화의 핵심을 리스크 관리에서 찾고 있다. 다양한 금융기법을 활용하여 일반사람들이 실제 경제활동에서 직면하는 금융 리스크를 완화해주는 것이다. 쉴러가 제시한 대표적인 리스크 관리 금융기법은 투자의 다각화(diversification)와 리스크 헤징(hedging)인데, 이러한 기법을 일반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금융민주화의 요체이다.

쉴러는 금융민주화를 국내경제 운용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따라서 쉴러의 논의를 국가 간의 지역금융협력에 단순 대입할 수는 없다. 금융민주화의 대상이 되는 “일반사람들”이 추상적으로 남기 때문이다. 금융민주화라는 개념이 동아시아 금융협력에 적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쉴러의 개념에 대한 창의적인 확장이 요청된다는 의미이다. 개념의 재구성과 함께 동아시아 금융협력에 적용될 구체적인 리스크 관리기법(혹은 방법론) 역시 제시되어야 한다. 기초 개념에서 적용까지 단계별 재구성이 필요하다.

본고는 동아시아 금융협력에 있어 금융민주화를 “금융기법을 무역, 투자, 개발 등 역내 실물경제의 발전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쉴러 방법론의 핵심인 리스크 관리, 즉 투자의 다각화와 헤징은 각각 “역내자본시장 발전”과 “역내금융안전망 구축”으로 치환될 수 있다. 역내자본시장 발전은 동아시아 경제주체들의 투자 다각화에 공헌을 하며, 역내금융안전망 구축은 국가 안팎의 경제흐름에 대한 헤징을 도와준다. 종합하면, 동아시아 금융협력에 있어 금융민주화는 “무역, 투자, 개발 등 동아시아 역내 실물경제의 건전한 성장을 돕기 위한 역내자본시장과 역내금융안전망의 병행 발전의 제도화”로 규정할 수 있겠다.

상기한 개념 정의와 작동 원리에 따르면 동아시아는 이미 금융민주화의 제도적 장치들을 초보적이나마 갖추고 있다. ABMI는 투자 다각화를 위한 역내자본시장 발전에 관여하며, CMIM은 헤징을 위한 역내금융안전망 구축의 예이다. 다시 말해, ABMI는 역내 로컬 비즈니스에 유동성과 투자를 제공하는 “적극적” 리스크 관리 기제이다. 역내금융안전망인 CMIM은 “방어적” 리스크 관리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의 발전이 지체되고 있으며 아세안+3이 동아시아 금융협력을 다소 기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데 있다.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동력은 당초 아세안+3이 공유하였던 “글로벌 경제에서 동아시아의 금융자율권 확보”라는 그랜드비전에서 나왔다. 아세안+3이 지난 15년 이상 역내금융협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비전의 결과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초의 비전이 여전히 처음만큼 강한 추동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앞서 2장에서 논한 CMIM의 중단기 과제들은 기실 새로운 내용이 아니며 아세안+3이 별다른 진척 없이 상당기간동안 논의만 반복하고 있는 이슈들이다. 아세안+3은 동아시아 금융협력 제고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여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아세안+3은 금융민주화 규범의 공유를 통해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비전공유를 통한 새로운 공동목표의 산출이다. 동아시아 금융협력을 금융민주화라는 규범을 매개로 하여 다시 조이고 묶는 것이다. CMIM과 ABMI의 제도적 발전을 단순히 기능적인 필요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금융질서의 민주화라는 큰 틀에서 협력을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아시아는 역내 금융민주화의 실천을 통해 글로벌 금융거버넌스의 새로운 질서를 개척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부상과 함께 금융민주화가 글로벌 금융거버넌스의 제도적 표준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결국 아세안+3이 정체되어있는 동아시아 금융협력을 재도약 시켜야한다는 공동의지와 비전공유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있다.

다가오는 2018년은 동아시아 금융협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앞서 논의한대로 2018년 아세안+3 회의는 CMIM의 협정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개정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2018년 회의의 결과에 따라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재도약의 기조로 돌아설지 아니면 지역협력이 단지 상징적으로만 남을지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은 2018년 회의에 공동의장국으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이 공동의장국으로서 당연한 문제들에 관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당위성과 기능성의 향방에 영향을 줄 것이다. 한국에게 동아시아 금융협력이 중요하다면 한국이 2010년 G20 서울회의에 쏟아 부은 노력이상으로 2018년 회의를 준비하고 이끌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지역통합 논의에서 자주 제기되는 질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의 어디에서 유럽연합의 단초가 된 “석탄과 철강협력”과 같은 파급력이 큰 이슈를 찾을 수 있을까? 동아시아 금융협력은 유럽의 석탄과 철강협력에 비견될 수 있는 이슈장악력이 있다. 금융협력의 제도적 공고화는 매우 높은 수준의 거시경제조율과 협력을 상설화 하는 것을 요청하므로 역내 국가 간 거시경제운용의 “제도적 맞물리기”(Institutional Interlocking)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중견국인 한국이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금융외교를 통해 슈만 플랜에 버금가는 동아시아 미래비전을 역내 국가들과 함께 엮어낼 수 있을까?

참고
[1]
Herberg-Rothe and Son 2017
[2] Kahler 2016
[3] Acharya 2011; Hall 2016
[4] Acharya 2016
[5] 1982년 8월 남미 부채 위기; 1990년대 초 북유럽 금융위기; 1992-1993년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통화 위기; 1994-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19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2008 미국발 금융위기; 2010년 유럽 국가부채 위기 등
[6] Grimes 2009
[7] Lee 2015
[8] 기획재정부 보도자료 2016년 12월 12일
[9] Kawai 2014
[10] Shiller 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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