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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브리프] 미국의 에너지 산업과 정책: Back to the Future?

나지원 (동아시아 연구원)

2017.11.07

프로젝트: 국내 5대 협력연구기관 공동기획 - 세계 싱크탱크 동향분석
제목: 각국의 에너지 정책 (1) 미국 - 미국의 에너지 산업과 정책: Back to the Future?
저자: 나지원 (동아시아 연구원)
No.2017-057


여시재는 국내 5대 협력연구기관과 공동기획으로 세계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한 각국의 현안과 주요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의 주제는 ‘각국의 에너지 소비·수요 전망 분석 및 에너지 수급 방안’입니다. 우선 각국의 에너지 수요·공급 현황과 전망을 알아봅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과 탈원전 바람 등에 따른 각국의 주요 에너지 정책 방향을 살펴봅니다.

파리 기후변화협약 탈퇴의 여파

지난 6월 1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파리 기후변화협약(이하 파리 협약) 탈퇴를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전 발언과 행보를 돌이켜보면 탈퇴 결정이 결코 뜻밖의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탈퇴의 함의와 여파를 고려할 때 실제로 탈퇴를 행동에 옮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견해가 미국 안팎에서 나오기도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협약 탈퇴 공약이 빈말이 아니었음이 드러나자 각 국에서는 파리 협약 자체는 물론이고 지구의 미래마저 더더욱 불투명해졌다는 암담한 전망과 격렬한 비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탈퇴가 미칠 부정적 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으며 특히 미국이 탈퇴한다고 다른 참여국들이 줄지어 탈퇴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애초에 파리 협약이 각국에게 부과하는 탄소 감축 의무는 각국이 자발적으로 제출한 기간과 양에 따른 것이므로 큰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탈퇴 선언이 나온 지 석 달이 지났고 지난 8월 초에는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탈퇴 통보를 했지만 아직 집단 탈퇴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협약 자체의 존망과는 별개로 탈퇴의 여파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여러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제 환경 레짐과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 선회는 미국 국내 차원과 국제 차원에서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유인구조(incentive structure)를 바꿔놓을 것이 명백하다. 또한 기후변화와 탄소배출 감축은 단순히 환경 문제로 환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산업, 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향후 전개를 반드시 다면적으로 살펴볼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를 한 축으로 하고 정치와 군사, 안보로 대변되는 상위정치(high politics)와 경제, 산업, 기술 등으로 대표되는 하위정치(low politics)를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사분면을 통해 미국의 파리 협약 탈퇴가 미칠 영향을 다각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잠자는 토끼와 달리는 거북이: 청정에너지 산업 지원 축소와 미-중 경쟁

우선 산업과 기술혁신 측면에서 보면, 파리 협약 탈퇴로 미국 국내 환경 및 에너지 산업과 연구개발 분야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 국내 신재생에너지 분야는 트럼프의 석탄 산업 부흥 공약과 함께 파리 협약 탈퇴의 직격탄을 맞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실제로 브루킹스 연구소는 탄소 배출 감축 추세에 역행하는 미국 정부의 정책과 예산안이 청정, 저탄소 기술 개발과 산업의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예측을 4월에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이미 내놓은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세계 청정기술 산업 규모를 약 1조 4천억 달러로 추정하면서 2001년 이래 미국 전체 특허 등록 증가 속도에 비해 청정 기술 관련 특허 등록이 더 빠르게 늘었으며 미국 내 대도시 권역별로 교통, 태양에너지, 에너지 저장장치, 효율 증진, 생물 연료 등 선도적인 분야가 다르다는 점에서 지역 제조업 부흥에 상당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뛰어넘어야 할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 번째는 2014년을 전후로 특허 성장세가 꺾인 것이다. 수많은 특허 기술 중 일부만이 상용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규 특허 건수가 줄었다는 것은 곧 혁신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정부의 법적, 경제적 지원이 필요조건이다. 정부 지원만으로 혁신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지원이 없다면 비약적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과감한 시행착오를 기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벤처자본(venture capital)의 청정기술 기업 투자는 2011~2013년을 기점으로 총액과 계약 건수에서 꾸준히 감소세에 있다. 더 큰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벤처자본 투자도 대부분 상업화가 거의 완료된 기술과 일부 분야(에너지 효율, 태양에너지, 교통수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패 가능성은 크지만 비약적 발전의 잠재력 또한 큰 첨단기술의 초기 연구개발 및 상업화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위축되고 개발 분야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민간 부문의 혁신 동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림 1] 미국 청정기술 벤처 투자 추이(투자 총액 및 계약 건수) (출처: 브루킹스 연구소)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다음 연도 예산안은 이러한 침체 분위기를 반전시킬 부양책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양상이다. 청정에너지 혁신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이다. 연방정부의 지원 감축이 미국 청정기술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두 번째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미국 청정기술 특허가 빠르게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중에서 해외 기업들이 소유권을 가진 특허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 예산 삭감이 미국의 기술 역량과 우위를 더욱 빠르게 침식할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러한 움직임이 얼마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지는 중국의 신재생에너지 산업 발전 및 투자 확대 동향과 대조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중국 정부는 2020년까지 3,600억 달러를 신재생에너지 산업에 투자하고 85개의 석탄 발전소 건설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 경제는 이미 빠른 속도로 에너지 효율을 높여나가고 있다. 1980년부터 2010년 사이에 중국 경제규모는 18배 성장했지만 에너지 소비는 같은 기간 5배 증가했다. 세계은행(World Bank)의 발표에 따르면 이는 GDP 단위당 에너지 원단위(energy intensity)가 70% 감소한 것이다. 미국의 파리 협약 탈퇴 발표와 함께 개도국 저탄소 기술 및 지속가능 경제성장 지원을 위해 마련된 녹색 기후 기금(Green Climate Fund)에 대한 미국의 참여 또한 불투명해지자, 중국이 곧바로 나서서 부족분을 담당하고 파리 협약의 동력 또한 주도적으로 살려나가겠다고 천명한 것 역시 세계 환경질서 건축경쟁에서 중국이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림 2] 2016년 국가별 신재생에너지 연구개발 정부지원 금액규모 (출처: 세계경제포럼)

그에 반해 미국은 이미 2016년 신재생에너지 관련 정부 연구개발 지출에서도 (단일 국가로는) 중국에 이어 2위에 그쳤으며 금액으로 따지면 거의 1/2 규모에 불과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제조업 부흥과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석탄 산업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각종 환경 보호 관련 규제 철폐를 진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실제로 기존 법령을 철회하려면 행정 절차와 소송이 몇 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당장은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8월 말 과학학술지인 네이처(Nature)가 폭로한 것처럼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가 여러 과학자들에게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에 대한 언급을 연구에서 삭제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지나친 낙관일 수 있다. 오히려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 정책결정자들은 탄소 배출 감축이 미국 경제성장을 저해한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토끼를 깨울 묘수: 연방제와 지방분권

하지만 브루킹스 연구소가 제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탄소 배출 감축은 미국의 경제성장에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33개 주가 2000년부터 2014년 사이에 탄소 배출량과 경제성장률 간의 상관관계를 끊어내고 “탈동조(decoupling)”에 성공한 것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탈동조의 주요인으로 원자력 발전 비중의 증가와 함께 상대적으로 탄소 배출이 적은 천연가스 연료 사용 증가를 꼽고 있다.

미국 국내 경제와 산업 차원에서 이처럼 연방정부의 협약 탈퇴 선언과 무관한 흐름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책과 산업구조 변화의 연속성이 보장될 수 있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방 정부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연방정부의 급격한 정책 노선 변경이 일으키는 충격을 지방 정부가 상당한 정도로 상쇄하고 있다. 에너지 안보 및 기후변화 전문가 사만다 그로스(Samantha Gross)는 특히 저탄소 및 탄소 배출 감축 관련 정책은 주로 주 정부 차원에서 결정과 집행이 되고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간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지난 3월 전망한 바 있다. 또한 당시 휴스턴에서 개최된 케임브리지 에너지 연구 협회(CERA)에 참석한 에너지 업계 인사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이들이 저탄소 에너지 기술이 여전히 큰 투자 기회로 보고 있으며 탄소세 부과 또한 지지했다고 언급했다.

물론 당시는 공식적으로 파리 협약 탈퇴 선언이 나오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탈퇴 이후 업계의 입장이 달라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6월 1일 트럼프 대통령의 탈퇴 선언 직후 나온 분석에 따르면, 적어도 상당수의 주 정부는 연방정부의 탈퇴 선언과 무관하게 독자노선을 취할 태세인 것으로 보인다. 미네소타 주, 미국 시장회의(U.S. Conference of Mayors) 등 지방 정부 및 협의 기관들이 다양한 형태의 협약과 선언을 통해 파리 협약의 기존 공약을 이행하고 준수할 것을 결의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비국가 행위자 기후 행동 구역(Non-State Actor Zone for Climate Action, NAZCA) 포털을 통해 중앙정부를 통하지 않고도 지방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들이 개별적으로 국제 사회와 공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미 세계적으로 6,000개가 넘는 지방 정부가 각자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설정하여 이 포털에 등록했고 미국에서도 이미 (주 정부 이하) 200개가 넘는 지방 정부가 등록한 상태이다.

이와 같은 “상향식(bottom-up)” 환경 레짐이 가능했던 것은 당초 파리 협약이 목표를 강제하고 이를 준수하지 못하면 규제하는 형식이 아니라 세계 전체 참여자가 자발적으로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정치의 특징인 연방제, 즉 중앙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 정부의 역할과 전통이 결합하면서 중앙정부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각 지역이 기존의 정책기조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른바 수직적 분권구조라고 불리는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의 권력 분립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다양한 정책실험을 통해 해당 지역에 적합한 정책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효과적인 정책을 상대적으로 적은 ‘실험비용’으로 검증할 수 있는 장치로 오랫동안 기능했다. 오랜 기간 미국 사회에서 논쟁거리였으며 몇 년 전부터 일부 주에서 적용되고 있는 마리화나 사용 합법화 역시 그러한 실험의 예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파리 협약 탈퇴 문제에서와 같이 중앙정부의 ‘오판’에 대해서도 지방정부가 일종의 거부권을 행사하고 기존 노선을 고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정책이 집행되고 성과가 나타나는 각 지방의 현장이 입는 타격은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캘리포니아, 인디애나폴리스 등 여러 주 정부 및 시 정부들은 이미 경찰차, 버스 등 공무용 차량을 전기자동차로 전량 혹은 단계적 교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탄소 배출량 중 약 2/3가 승용차에서 나온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정책의 지속과 강화는 필수적인 과제다. 이와 관련하여 자율주행차 도입 및 (우버 등) 자동차 공유제의 확대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도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카네기국제평화연구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의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과 팀 스토러(Tim Storer) 선임연구원은 이러한 직관적 주장이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동차 공유제가 확대될 경우, 전체 자동차 대수는 줄어들겠지만 자동차 1대당 주행거리는 (여러 사람이 끊임없이 자동차를 사용하게 되므로) 대폭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적,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연비와 배기량을 개선하는 기술도 함께 진보하지 않으면 탄소 배출량 감축에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울 수있다는 결론이다.

지방분권의 함정: 지역 간 격차 확대와 정치적 분열

이처럼 어떤 개혁이든 제도, 인식, 기술이 보조를 맞추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명제는 환경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의 경우, 교통수단과 함께 신재생 청정에너지 기술 중 상용화가 많이 진행된 옥탑 태양광 패널(rooftop solar panel)의 보급과 확산을 촉진하기 위해 관련 세제(稅制)와 규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즉, 현재 조세 및 전기요금 제도는 대규모 상업용 패널 발전 사업에 큰 혜택을 주는 반면, 가정용, 개인용 태양광 패널 설치와 사용에는 별다른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립 월럭(Philip A. Wallach)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6월에 발간된 보고서에서 향후 전력망(electric grid)에서 가정용 태양광 패널의 비중이 더욱 커질 것이며 이에 부응하기 위한 제도 개혁이 시급하다고 제언하고 있다. 특히 현재 요금 구조는 기존의 발전, 송전, 배전 체계가 앞으로도 지속하리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가 발전 확산 등의 시대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도리어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전기 생산이 초래할 부작용만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각 지역의 기존 건축법과 용지 관련 규정 역시 태양광 패널 설치를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제도 개혁과 기술 확산에서도 지역이나 주마다 편차가 클 뿐만 아니라 지리와 산업구조의 차이가 이러한 간극을 더욱 벌리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탈동조화(decoupling), 즉 탄소 배출 증가를 억제하면서도 경제성장을 이뤄내고 있는 지역은 상대적으로 서비스업과 첨단 산업이 발달한 북동부와 서부에 집중되어 있고 석탄 발전(發電)을 천연가스 발전으로 대폭 전환한 남부 지역이 그 뒤를 이어 탄소 중심 경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반면,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불리는 전통적인 굴뚝 산업 중심의 중서부 지역은 성과가 미진하거나 여전히 경제성장이 탄소 배출량에 비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대의 추세에 역행하면서 석탄, 석유 등 화석연료 채굴 및 생산 관련 산업을 부흥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역 간 산업, 경제, 에너지 구조의 격차가 커지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침체된 지역 유권자들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에 적절한 구호이자 전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표를 위해 일종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은 단기적으로나 정치인 개인 차원에서는 이득이 될 수 있을지언정 국가 차원에서는 언젠가 직면해야 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결속과 발전을 저해할 위험을 품고 있다. 주별 탄소 배출 감축성과와 지난 2016년 대선 결과를 비교하면 에너지원의 차이가 정치 대립으로까지 이어지는 양상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환경 문제는 국경이나 주의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처럼 지역별로 판이한 미국의 에너지 정책은 지구 차원에서도 결코 이롭지 못하다. 일부 지역이나 국가에서 탄소와 온실 가스 배출이 지속되거나 증가한다면 다른 지역이나 국가가 아무리 저탄소, 친환경 정책을 철저히 시행한다고 해도 사실상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형편과 이해관계에 맞는 정책 실험과 적용이라는 연방제의 장점이 이처럼 공유재(또는 공공재)의 성격을 띠는 사안에서는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림 3] 미국 주별 탄소 배출 감축 추이(1990-2014) (출처: 미국 환경보호국)

더불어 미국의 에너지 업계와 정책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또 다른 문제는 이른바 진자 효과(pendulum effect)다. 트럼프 행정부가 규제완화 등을 통해 화석연료 산업에 친화적인 정책기조를 밀어붙인다고 하더라도 차기 정부에서 이를 지속하지 않거나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기업들은 이러한 역풍(backlash)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을 위험부담을 지게 된다는 뜻이다. 에너지 산업의 특성상 개발, 채굴, 운송 등을 위한 시설 마련을 위해서는 대규모의 장기 투자가 필수적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정책 노선은 트럼프의 공약과 달리 불확실성을 가중시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악수(惡手)가 될 수도 있다.

에너지 순수출국 미국의 전략적 기로

다만 화석연료 산업 부흥을 강조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노선이 마냥 비현실적이거나 인기영합(populism)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평가할 여지도 있다. 소위 프래킹으로 불리는 수압균열법(hydraulic fracking)과 셰일(shale) 추출 석유 및 가스 생산 기술 등 일련의 기술 혁신 덕택에 미국의 석유 및 가스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미국이 석유와 천연가스의 순수출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 덕분이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지난 1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2026년경 에너지 순수출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림 4] 미국 에너지 교역 규모 시나리오별 전망 (출처: CSIS)

하지만 이 예측이 적중하느냐는 국제정세와 화석연료의 시장 가격에 달려있다.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 예측이라는 말이다. CSIS의 보고서 역시 기준 예측(reference)과 함께 유가와 세계경제성장률에 따른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어느 시나리오로 가더라도 과거 20년간에 비해 미국의 에너지원 대외의존도가 낮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맞다.

여기에서 경제성장률과 유가만큼이나 중요한 제3의 변수가 있다. 화석연료 관련 기술발전이다. 이는 사실 탄소 배출 감축에서 간과되기 쉬운 요인이기도 하다. 대체로 탄소 저감 기술이라고 하면 신재생에너지 기술의 발전과 확대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청정에너지 기술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존 화석연료의 생산, 운반, 소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줄이는 기술이다. 크게 보면 같은 화석연료 중에서도 석탄보다 천연가스를 사용한 발전 비중이 커지는 것 역시 이러한 개선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술 발전이 동반된다면 미국이 석유나 가스 등의 화석연료 생산과 수출을 증가시키더라도 반드시 탄소 배출 감축 노력과 상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계 유가 급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셰일 석유(tight oil) 생산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비교적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기술 향상의 결과로 시추나 채굴 등 생산 비용이 전반적으로 낮아진 것을 한 가지 원인으로 들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국내에서 생산되는 연료의 시장 경쟁력에 그저 흡족해 하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특히 에너지 산업, 그 중에서도 석유는 전략 자원으로서 현대세계에서 정치, 군사, 안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제정치적 계산은 더욱 복잡해진다. 무엇보다 기존 주요 산유국, 특히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중동 산유국들과의 관계 재조정이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장기적 이윤 창출보다 단기 현금 유동성 확보에 치중하는 듯한 미국 석유 생산 기업들의 행보를 비판한 바 있다. 미국 기업들이 석유 생산량과 속도를 적절히 제어하지 않아 공급측면 충격을 주고 결과적으로 시장을 교란시킨다는 것이다.

CSIS의 안보·전략 전문가인 앤서니 코즈먼(Anthony H. Cordesman)은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면 국제정치적으로 미국의 입지가 약화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중동 국가들이 미국과 멀어지는 동시에 러시아나 중국에 포섭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동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여전히 높으며 이 지역으로부터의 안정적인 석유 공급에 경제의 사활이 걸린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들(한국, 일본, 대만)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동맹 체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한다. 파리 협약 탈퇴로 한번 흔들린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특정 산업의 단기적 이익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재차 약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파리 협약 탈퇴 선언은 미국 국가 차원의 소득은 별로 없이 미국의 입지와 영향력만 약화시키는 상황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경제 면에서는 경쟁국들에 비해 자국의 신재생 및 청정에너지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국제 환경문제에서 미국의 선도적 위치로부터 제 발로 내려오는 조치인 동시에, 국내 산업에서도 정책 일관성의 부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연구개발 및 설비투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대전략의 관점에서도 미국의 우방 및 동맹국들과의 공조와 협의는 약화되고 오로지 편의와 이익에 따르는 거래의 측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오히려 국제사회의 합의와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비용은 더 커진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항상 강조하는 이른바 “미국 문제 우선”이라는 원칙하에 미국이 세계질서 관리에서 대폭 손을 뗀다면 단기적인 비용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현재의 국제정치경제체제 하에서 누린 독보적 지위와 명시적, 암묵적 혜택을 고려하면 ‘방관’의 장기적 비용은 단기적 이익을 금세 넘어선다. 미국의 정계가 이러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빠른 시일 내에 태세 전환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 국가 에너지 수요의 막대한 부분을 해외로부터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역시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을 위한 모든 자구책을 모색하는 동시에 파리 협약을 성실히 준수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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