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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기의 설계자들] 근대 독일에 비스마르크가 있었다면 현대 독일엔 아데나워가 있었다

작성자 : 황동일 2019.10.10 조회수 : 1984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근대 독일에 비스마르크가 있었다면 현대 독일엔 아데나워가 있었다

– 냉전의 벼랑에서 조국을 구해낸 강인한 현실주의 정치가



황동일 기획위원





<편집자 주>

대전환기다. 냉전 70년 만에 탈냉전과 미국 단일 패권시대가 왔고, 그 이후 30년 만에 패권 질서 재편의 시기에 들어섰다. 여기에 4차 디지털 기술혁명이 표준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의 권력이동이 가로 세로축으로 교차하면서 세계적 수준에서 격랑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이런 대변동기에 야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전장(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되거나 식민지가 되거나 분단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미·중 패권 경쟁의 격화로 인해 커져 가는 지정학적 리스크, 강제징용자 문제로 빚어진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와 한·일 갈등 등이 한국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한다. 새로이 열리는 위기의 징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시대의 성패도 갈릴 것이다. 크게 보고 현명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사에는 전환기적 상황 속에서 국가를 일으켜 세운 거목들이 있다. 여시재는 그들로부터 이 대전환기를 헤쳐나갈 슬기와 지혜를 얻고자 한다. 이번 순서는 전후 폐허 독일을 재건하고 냉전의 벼랑에서 조국을 구해낸 서독 초대 총리 콘라트 폰 아데나워다. 


<아데나워는>


쾰른 시장 시절 아우토반 첫 건설

나치 혐오, 10여 년간 연금-투옥-도피 생활

콘라트 헤르만 요제프 아데나워(Konrad Hermann Joseph Adenauer)는 세계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이라 불린 서독의 초대 연방 총리이다. 4번에 걸쳐 14년 1개월간 총리로 재임하며 연합 점령군 치하의 전범국가를 정상국가로 다시 세우고, 경제를 재건해 현대 독일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근대 독일에 비스마르크가 있었다면 현대 독일엔 아데나워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1876년 쾰른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대학 법학과 졸업 후 쾰른시 재판소에서 배석판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17년 41세의 나이로 쾰른 시장에 취임했다. 시장 재임 시절 자동차 공업을 육성하고, 독일 최초의 자동차 전용 도로인 쾰른-본 아우토반을 건설했다. 이것이 1964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영감을 줘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모티브가 됐다.

쾰른 시장 아데나워는 파시즘을 증오했다. 히틀러를 연방 총리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쾰른에 나치 깃발을 꽂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아데나워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다. 아데나워는 10년 이상 연금과 투옥, 도피 생활을 했다. 아내를 잃었고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패전 직전인 1944년엔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아데나워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 개신교와 가톨릭의 중도 우파 연합 정당인 독일기독교민주당(CDU) 창당에 참여하여 당수가 되었고, 1948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둬 1949년 73세의 나이에 연방 총리가 되었다. 경제 등 내치 부문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상에게 주로 맡겼다. 두 사람은 여러 정치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계획경제에 반대하고 시장경제의 힘을 믿었다는 점에서 생각이 같았다. 복지국가 건설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복지의 중요성을 생각했다는 점도 같았다. ‘라인강의 기적’을 얘기할 때 항상 두 사람을 드는 이유다. 

아데나워는 국가의 정체성을 재건하는 데 주력했다. 기본 노선은 ‘친서방·반(反)공산’이었다. 동서 균형외교가 아니라 ‘서방외교’에 주력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썼다.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집단 안전보장 체제인 ‘북서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했다. 총리에서 물러나기 직전인 1963년에는 200년간 25번의 전쟁을 치렀던 프랑스와 ‘엘리제조약’이라는 우호 협력 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서독이 ‘전범국가’에서 정상국가이자 서방 세계의 주요 멤버로의 복귀가 사실상 완료됐다.

아데나워는 수상 자리에서 내려오던 1963년 공영방송과의 고별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라고 했다. 그의 인생 자체가 축약되어 있는 말이었다. 아데나워는 4년 후인 1967년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독일 국민들은 냉전의 벼랑에서 국가를 재건한 강인한 현실주의 정치가의 업적을 기려 주요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이고 여러 곳에 동상을 세웠다.





<신창섭-이광재 대담>

아데나워와 그가 수상으로 일했던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의 상황은 여러모로 6.25 전쟁 후 대한민국의 상황과 겹친다. 어떻게 아데나워와 독일은 폐허와 전범 국가라는 낙인을 딛고 일어서 경제 대국과 통일의 미래를 열어젖혔을까? 『기적을 이뤄낸 아데나워 리더십』을 쓴 신창섭 전 MBC 방송국 베를린 특파원과 여시재 이광재 원장이 아데나워 리더십에 대해 대담했다. 신창섭 전 기자는 MBC에서 25년간 일한 베테랑 기자로 독일 한스자이델재단에서 연수하고 베를린 특파원을 지낸 경험을 토대로 『아데나워 리더십』 외에도 『독일 통일과 미디어』, 『타게스샤우』, 『북중 변경 르포, 1300』 등 독일과 통일, 미디어를 주제로 한 여러 권을 책을 집필하였다.


국가권력이 소멸된

‘제로의 시간’에 집권

‘스툰데 눌’(Stunde Null), 독일 사람들이 1945년을 일컫는 말이다. ‘제로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간 시대 상황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장장 5년 251일간의 전쟁으로 독일에서만 65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영토의 4분의 1을 잃었고, 남은 영토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네 나라에 의해 분할 점령당했다. 전쟁 전과 대비하여 산업 시설의 2/3가 파괴되어 경제 기반이 초토화되었다. 독일 국가권력까지 소멸된, 말 그대로 ‘제로의 시간’이었다.

국토의 상실, 경제 기반의 상실 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뢰의 상실’이었다. ‘전범국가’로 낙인찍혀 국가로서의 독립과 자존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영국의 처칠은 최소한 20년은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국민들도 위대한 ‘게르만 민족’에서 하루아침에 미치광이 독재자를 추종하여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고 유태인만 600만 명을 독가스실에 밀어 넣은 전쟁 범죄자들로 전락했다. 국민들은 당장의 ‘생존의 위기’로 내몰렸고, 국가는 주권국가로서 지속가능성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44년 9월 캐나다 퀘벡에서 진행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과의 양자 회담에서 미국의 재무장관 모겐소가 입안한 이른바 ‘모겐소계획’에 합의했다. 모겐소계획은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 방안을 담은 것으로서, 주요 내용은 독일의 철저한 비군사화와 비공업화였다. 특히 루르와 자르 지역의 공업지구를 폐쇄하고, 지구 내에 있는 공업 시설 일체를 철거하여 소련을 비롯한 전쟁 피해 국가에 손해배상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독일이 3차 대전을 획책하지 못하도록 군수시설 전환이 가능한 기술과 시설을 모두 국외로 이전한다는 목적에서 입안된 것이었지만 이 계획이 합의대로 실행되면 독일은 산업사회 이전의 농경사회 수준으로 퇴행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위기에 봉착한 셈이었다. 결국 그 극단성으로 인해 비판을 받은 끝에 루스벨트는 이 계획의 실행을 주저하였고, 다음 대통령인 트루먼에 의해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모겐소계획을 둘러싼 갑론을박과 그 진행은 전후 패전국가이자 전범국가로서 독일이 처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독일은 서구 세계의 ‘적대적 외부자’였고, 미래에 현실화될지도 모를 전쟁의 위험을 미연에 예방하기 위해 철저하게 짓밟아 놓아야 할 거대한 ‘잠재 위협’이었다.

 



정치적 입장 떠나

필요한 사람이라면 폭넓게 발탁

이런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구원 등판한 이가 바로 콘라트 아데나워였다. 신생 서독의 수상을 맡은 아데나워에게는 독일의 미래를 열어나갈 어떤 연장도 재료도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위기를 헤쳐나갈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는 그 자신이 나치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우파 정당의 당수였음에도 독일의 현재를 복구하고 미래의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 정치적 입장과 이념적 차이를 뛰어넘어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전범은 예외였지만 단순 나치 부역자 중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은 발탁했다. 자신의 비서실장도 그런 사람이었다. 신창섭 전 특파원은 “아데나워는 국정을 펼치는 데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정파에 관계없이 사람을 기용해 쓰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며 “아데나워의 실용적 성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시대 상황 자체에 합리적으로 적응한 결과였던 측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기득권층이 모두 반대한 

연금개혁 밀어붙여

아데나워를 중심으로 모인 인재들 중에 아데나워가 몸담은 기독민주당과는 다른 자유민주당 소속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그의 후임 수상)가 있었다. 자유민주당은 무신론자들의 정당이었다. 신 전 특파원은 “아데나워는 전후 독일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에르하르트를 삼고초려 했다”고 했다.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두 보수 정치인이 펼친 정책은 당시 좌우파 세력의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도, 소련식 계획경제도 아닌 ‘사회적 시장경제’를 독일에 입혔다. 아데나워는 이를 지지했다. 두 사람은 주류 사회와 기득권층이 모두 반대하던 연금개혁도 성공시켰다. 신 특파원은 “두 정치인은 산업 시설은 물론 학교와 집 등 거의 모든 사회 기반 시설이 완전히 폐허가 되고 제로가 된 정말 어려운 상황이지만 빵만으로는 이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없다, 어려울수록 복지도 필요하고 연금도 필요하고 휴가도 필요하다는 데 당시 의기투합하여 과감히 정책으로 도입하고 실행했다. 이것이 바로 독일 특유의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으로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경제 민주화라고 할 만한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정책 기조를 우파 정부에서 출발시켜 오늘날까지도 독일의 근본적인 경제 철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의 경제정책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지켰다.


“독일 경제발전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한국전쟁”

에르하르트는 후일 회고록 ‘모두를 위한 번영’에서 “독일 경제발전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 한국전쟁”이라고 한 일이 있다.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만 살린 게 아니라 독일 경제까지 살린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만 독일 수출은 2배 이상이 늘고 성장률은 매년 10% 이상이었다. 한국전쟁이 독일에 영향을 미치고 독일의 아우토반이 경부고속도로의 모티브가 되었다.  


“독일은 서방의 양탄자 위에 올라타야

번영할 수 있다”

아데나워가 독일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무엇보다 외교 분야이다. 전범국가 독일에 미래는 없었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의 관리 아래 놓여 독자적인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손발을 잘라놓고자 했다. 분단된 베를린에 독일 국적기가 취항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큼 전승국들의 통제가 엄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200년 동안 25차례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 화해하며, ‘유럽 통합’을 모색하는 이른바 ‘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아데나워의 이런 행보에 대해 야당인 사회민주당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도 ‘왜 독일은 제쳐놓고 유럽만 생각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그는 당장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노선과 정책을 실천해갔다. 아데나워는 말했다. “우리는 서방의 양탄자 위에 올라타야 번영할 수 있다.”


1949년 9월, 페테스부르크에 개최된 독일 연방 공화국 출범식 후 발걸음을 옮기는 아데나워 


“당장의 통일 보다는 

서방의 일원이 되는 것이 

통일을 위해 낫다”

그 결과 1949년에는 연합군정 당국과 페테스부르크협정을 체결하여 국가 주권 회복의 초석을 마련했다. 아데나워는 그해 9월 신정부 출범식에서 연합국 대표들이 서 있던 ‘레드카펫’의 한 자락을 밟고 서서 출범을 신고했다. 독일 언론들은 이 사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다. 이후 아데나워의 서독은 1951년에는 프랑스가 주창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설립에 적극 참여하여 서구 사회의 재진입에 시동을 걸었다. 석탄철강공동체 가입을 통해 독일의 석탄 생산 중심지인 독일의 루르 지방이 연합국의 관리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주권 회복에도 탄력을 받았다. 1952년에는 이스라엘과 배상 협정을 체결하여 나치 시대에 희생당한 이스라엘인들에게 30억 마르크의 손해배상 지급에 합의함으로써 실추된 국가의 도덕적 권위 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1955년에는 서방국가들의 집단안전보장 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정식 가입하여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으며, 나토 가입과 함께 소규모로 나마 정식 군대를 보유하여 정상국가로의 복귀에 성공하였다. 당장의 통일보다는 서방의 신뢰를 얻어 국력을 키우고 서방의 일원이 되는 것이 후일 통일을 기하는 길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고 결국 이게 정확했다.


스탈린의 ‘독일 중립화 제안’ 정면 거부

한편에선 소련과의 국교 교섭

1952년 스탈린이 독일을 흔들어놓는다. 동-서독 통합 선거를 통해 독일 지역 전체를 중립화하자는 것이었다. 독일 내부가 갈라졌다. 통일의 호기가 왔다는 측이 있었지만 아데나워는 ‘소련의 암수’라고 판단했다. 독일을 중립화한 뒤 지리적 근접성과 무력을 이용해 소련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스탈린의 술책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서독 국민들은 총선에서 아데나워의 손을 들어준다. 

아데나워는 그러는 한편 소련과의 국교 교섭에도 들어갔다. 서방 정책과 소련과의 국교 수립이라는 양면 정책이었다. 그는 나토 가입과 동시에 직접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통해 소련과의 정식 국교 수립에 합의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포되어 소련에 억류되었던 독일군 포로 1만여 명을 전원 독일로 데려왔다.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 없었으면

브란트의 ‘동방 정책’도 없었다

아데나워 외교의 백미는 프랑스와의 화해를 성공시킨 것이었다. 비스마르크 이래 숙적 관계였던 프랑스의 강성 지도자 드골과 머리를 맞댄 끝에 엘리제협정 체결에 성공했다. 아데나워가 14년간의 수상직을 사임하던 1963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독일을 패전국가, 전범국가에서 정상국가로 돌려놓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아데나워가 닦아놓은 초석 위에서 빌리 브란트가 ‘동방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고, 두 사람의 동·서방 정책의 성과를 물려받아 헬무트 콜 수상이 마침내 동·서독 통일을 무사히 갈무리할 수 있었음은 역사가 익히 증명하는 바다. 신 특파원은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과는 정반대의 동방 정책을 펼쳤던 사회민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 수상은 아데나워가 당수를 지낸 기민당과의 대연정을 통해 총리 자리에 올라 동방 정책을 펼치고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인데,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아데나워가 서방 정책을 통해 국가 주권을 회복하고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서구 세계와의 관계를 정상화 해놓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아데나워가 서부 전선을 탄탄하게 구축해서 서부 전선에 이상이 없으니까 이제는 동부 전선으로 확장한다, 그런 동방 정책을 시행했다고 보는 게 지금 독일 국민들의 일반적인 평가”라고 말했다.  


“서독은 정권이 바뀌어도

동독과의 교류-협력 중단한 적이 없다” 

이광재 원장은 “아데나워 수상이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 동·서독 교류를 지속해 시간을 벌었던 것, 이 전략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동북아도 남·북 문제가 풀려야 하나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결국 동·서 독일의 통일이 유럽 통일의 마지막의 열쇠였다면 남·북 통일은 동북아 협력의 마지막 열쇠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독일이 결국 주변국 반대를 물리치고 비스마르크 때 한번, 2차 세계대전 이후 콜 수상 집권 시기에 다시 한번 통일을 성공시키고 지금은 결국 다시 유럽의 진정한 최고의 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런 걸 보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신 특파원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정책을 구사하면서 미래 비전을 가꿔 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에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한다든가 정책을 수립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현실적인 능력과 같은 리더십이나 필요하다. 통일 문제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독일도 통일 과정에서 아데나워부터 콜 시대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분명한 것은 동서독 간에 인적 교류와 협력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보수 기민당 정권이든 진보 사민당 정권이든 일관되게 계속 유지되왔다. 그런 부분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남북 정책에 있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지속 가능성을 가지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우리는 절대 작은 나라가 아니라 남·북한 합치면 인구 8000만”이라며 “독일이 해낸 것을 우리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우리가 너무 주눅 들어서 우리 운명을 보는 게 아닌가, 뭔가 꿈을 새롭게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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