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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2600명 과학기술 연구자들의 열망이 국가 자산이 되기를 소망한다” - 25개 정부출연연 연구자들이 ‘일본발 소재∙부품∙장비 대란’에 부치는 목소리

대표집필/안오성 (정부출연연 과학기술인연합회 총연합회 정책연구소장)

2019.08.31

일본의 소재부품 수출 제한 조치가 장기화될 우려가 높아지면서 각계 의견이 쏟아지는 가운데, 정부도 빠른 대안을 내놓고 있다. 핵심기술 대외 의존형 국가 성장 모델에 대한 경고음이 울린지도, 대안을 모색한지도 20년이 넘는다.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문제의 바닥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같은 경로를 밟게 될 것이다.

이런 때 25개 정부 출연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 2600여 명의 대표조직 ‘출연연 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가 내부 논의를 거쳐 이번 정부의 ‘소재∙부품∙장비산업 육성’ 정책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내부 논의를 거쳐 안오성 정책연구소장이 대표 집필 했다.

일본 탓할 것 없다
전략적 사고 취약했던 우리 탓해야

현 사태의 분명한 메시지는 첨단 부품∙소재∙장비가 패권국들의 정치적 도구가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점이고, 국제분업도 패권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우리는 거기에 대책 없이 노출되었다. 국가의 전략적 위기 감지와 대응 기능에 큰 결함이 드러난 셈이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미국 중심 국제질서 또한 계속되리라는 가정 속에서 도외시했던 국가 차원의 전략을 가다듬는 계기로 삼는 것이 본질이라 본다. 일본 탓할 거 없다. 전략적 사고에 취약했던 우리를 탓하고 근본적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작년 말 고등훈련기 T-50 미국 수출 시도가 약 10년의 도전 끝에 좌절됐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항공 우주의 절대강자 미국마저도 WTO 체제를 세련되게 무시해가면서 자국산 부품과 산업 생태계를 보호하려 하는 모습을 맛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수출 무산을 아쉬워했을 뿐이다. 미국의 국가 전략에서 배우고 심지어 모방하려는 리더십은 보이지 않았다.

정부와 전문기관과 위원회와 연구자들은 선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충분한 성과가 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상위 전략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해양연구소 정희수 책임연구원은 “우리의 국가 규모에 맞는 첨단 기술의 보험(안보)성 기술 확보와 유지를 어느 수준, 범위로 할 것인지”가 고민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큰 담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소재 분야 원로 연구자는 “전략적 소재∙부품 국산화라는 특정 사안으로 문제 범위를 축소하고 한정시켜,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계획과 해법을 관련 주체들이 모두 모여 함께 마련하도록 하고, 다만 정부는 그러한 논의의 촉매 역할과 그 해법의 추진을 지원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이번 부품∙소재 산업 도전을 위한 5가지 경계해야 할 점과 단-중-장기 대안 3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또한 기본을 찾아가되 어느 기본을 찾아가야 할지를 제시해보려 한다.

(출처: 전자신문)

# 경계할 점 5가지

(1) 예산 증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산 증액이 아니다. 기업과 대학, 정부 출연연구소들이 이전과 다른 태도로, 구체적 대상과 목표와 방안을 정의하고 이를 풀어나가는 협력의 방정식을 창출해내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전략적 내재화’라 표현하고 싶다.

지난 20여 년간 이 분야에 투입된 정부 예산이 수십조 원이다. 산업부는 ‘소재부품기술개발사업’으로 최근 5년만 해도 매년 3000억 원 가까운 돈을 투입했다. ‘산업소재핵심기술개발사업’, ‘소재부품기술기반혁신사업’ 등 유사 사업들에도 매년 150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이 들어갔다. 이 외에 기계장비 관련 예산이나 반도체 관련 예산, 중기부 예산, 그리고 별도로 통계에 계수되지 않는 국방 부문 예산 등을 합하면 매년 2~3 조원의 재원이 소재∙부품∙장비에 투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도 정부 R&D 사업 중 성과가 저조한 분야였다. 예산 규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런 역사를 지켜본 양준철 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얼마 전 여시재 기고문에서 “30여 년 전부터 부품과 소재를 개발하여 대일 무역역조를 타개하고, 기술 자립을 하자는 정부 계획이 여러 차례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율은 여전히 20%대 미만에 머물러 있고, 대일 무역역조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양 전 부회장의 말에서 ‘부품∙소재’ 자리에 ‘엔지니어링’ ‘국방-항공’ ‘로봇’ ‘바이오’를 넣어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부는 장기적으로 국가적 위기를 인지하고 오랫동안 투자를 해왔다. 성공도 있었다. 그러나 기술격차, 산업 역량 격차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 예산으로 1조 원 넘는 돈이 추가 투입된다는 소식을 접한 한 원로 정책 전문가는 “이대로라면 국민 세금 1조 원은 하늘의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아직 대안을 모아가는 단계이므로 때이른 우려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예산 규모 확대와 함께 나온 대책들이 이미 다 해보았던 것들이고, 더구나 열심히 해보았던 것들이다. 그래서 비관적 전망을 감히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혁신역량 결집을 위한 전략의 내재화다.

(2) 이미 실패한 것에서 출발을

소재부품 관련해서는 이미 해 볼 것은 거의 다 해보았다. 소재 부품에 주목한지도 20년이 넘었다.

항공 우주에 필요한 첨단 복합소재(T-800급)는 경제성 확보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과감히 도전했었다. 그간 투입된 돈은 조 단위를 훌쩍 넘어설 것이다. 기계 산업의 꽃이라 할 터빈엔진도 수조원이 단일 기업에 수십 년간 전폭적으로 지원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싱가포르 기업에도 밀리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더 가관인 것은 국내 면허생산을 전제로 개량 설계에 수천억 원 지원했는데 우리에겐 별 부가가치 없는 것만 남고, 해외 엔진 제작 업체가 자사 모델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에 그 많은 R&D 예산이 들어간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해당 우리 기업의 글로벌 기술역량은 조금도 진화하지 않았고 결국 매각 수준에 들어갔다.

그 기업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수십 년간 수 조원의 독점적 지원이었다 해도 매번 연속성 없이 정부 맘대로 한 것 아니냐”고. 정부도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전문가 집단 (산학연)이 뜻을 모아온 대안이었지 않은가?”라고. 이런 현상이 글로벌 혁신 경쟁의 절대적 열세 속에 있는 대부분의 산업 영역에서 재현되고 있다. 관건은 책임소재가 아니라 혁신주체들의 이해관계와 역량을 미래가치 중심으로 (당장의 수익성, 예산 확보성과, 승진 명분용이 아닌) 결합을 유인하는 제도의 설계이다. 다시 말해, 예산 따내기 위한 경쟁 프레임을 타파하고, “문제를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관련된 거버넌스 설계의 문제다. 현재 순환보직 체제의 관료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다.

한국은 세계 최초의 수소연료전지 자동차를 상용화했다. 그러나 현대차의 혁신은 외부로 연결되지 못했다. 최근 거론되는 시스템반도체 기술 개발 역시 이미 20여 년간 국내 기업 간(삼성전자 - 현대자동차)의 단절 속에 고만고만한 기술 개발 활동에 그쳐왔다. 세계 최초로 CDMA 이동통신 기술을 상용화하고도 이후에 산업-출연연간 혁신 협력의 방정식 부재로, ETRI의 연구역량이 삼성전자에 간접적으로 (논문, 특허로) 흘러들어가는 데에 그치거나, 해당 공개된 정보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이동통신이 단기간에 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5G 모뎀칩 개발 시도에서 삼성전자와 관련 부처는 ETRI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삼성전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사산하고 말았다. 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며, 세계적 논문-특허를 쏟아낸다고 해결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글로벌 선도기업이 내미는 협력 제안의 미끼를 물면 오히려 독배가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런 반복적 헛스윙이 성찰 없이 지속되는 것이 불안하다. 이번 도전은 새로운 무엇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실패한 데서 길을 찾아야 한다.

(3) ‘국산화’라는 함정

김용래 산업부 통상 차관보는 “소재 장비 산업 부분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대기업은 앞으로 더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대기업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소기업 소재나 장비를 대기업들이 강제구매토록 해야 한다’ 같은 근시안적 대안 또한 해법일 수 없다.

국산화를 제대로 하고도 좌절을 보는 경우는 허다하다. T-800급 복합소재의 경우, 해외 선도 기업은 이보다 성능이 더 좋은 T-900급 소재와 T-1000급 소재를 덤핑하는 방식을 썼다. 그렇게 해서 국내 기업의 세계시장 진입 자체를 원천 차단했다. 이번에 일본의 보복으로 문제가 되는 소재들도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세계적인 전투훈련기에 들어가는 가상 모의 전투지원장치(ETS: Embedded Training System)를 세계 3번째로 국내 중소기업이 개발하였고 산업부와 국방부도 그 개발 기술의 성숙도를 인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개발하는 차세대 전투기 KFX는 네덜란드제 핵심 기술을 바탕으로 시스템이 개발되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이 개발한 데서 비롯된 납품 지연 위험을 누가 질 것인가를 둘러싼 공방이 해결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불상사다.

따라서, 국산화가 능사가 아니다. ‘프로페셔널한 비관주의’가 먼저 필요하다. 산학연이 뜻을 모으거나 산학연 간 기술 로드맵 공유는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마저 위임과 전문성 중심의 문제 해결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으면 이 또한 기존 경로 속에서 절차적 정당성으로 소비되는 데에 그칠 수 있다.

(4) 시장논리라는 이름의 ‘기회주의적 경쟁’

필자가 스마트 무인기 개발사업을 하면서, “이 부품은 정말 말 그대로 ‘대박’”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품이 있었다. 복합재로 고출력의 동력을 전달하는 부품을 초경량 일체형으로 제작하는 기술인데, 공정 기술 자체도 워낙 저렴해 그 이윤이 놀라운 수준이었다. 스마트 무인기 개발 참여기업과 함께 해당 기업 실사를 갔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참여기업의 담당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알고 보니 이 기업이 스마트 무인기에 참여한 이유는 항공 우주 부문 참여기업이라는 이미지 제고를 통해 기업의 몸집과 가치를 키운 뒤에 매각하기 위함이었다. 당장 돈이 되는 다른 사업의 확장을 위해 항공 부문 사업은 매각하겠다는 것이 해당 기업의 중기전략이었다.

이것을 기업의 도덕적 해이 문제로 보기보다는 경쟁과 인센티브 유인 체제의 고난도 과제로 바라봐야 한다. 기업은 경제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Risk Taking’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운영 시스템의 한계가 문제다. 어떻게 하면 기업가정신을 유인하고,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공공분야가 짊어지고, 도덕적 해이도 피할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해야 한다.

기업가정신을 유인하는 정부의 역할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중복 경쟁’ ‘뜨는 주제 선점하기’가 벌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하위에 있는 대리인들이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바로 경제학에서 논하는 ‘혁신 구축(crowd out) 효과’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이 경고한 바와 같이, 산학연 혁신주체들의 ‘시민성’마저 구축(무감각화)될 수 있다. 상위 거버넌스의 문제를 하위 혁신주체가 제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뛴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언덕을 넘을 수 없으며, 체제의 비효율성은 점점 더 구조화된다.

이런 문제가 어느 특정 부문에서만 발생할까? 아니다. 시장논리에 안주하며 기회주의적인 경쟁적 개입주의 양태를 보이는 모든 형태의 정부의 대형 투자·적극적 의지 표명 뒤에서 재현되고 있다. (스마트 농업, 미세먼지, 청정에너지, 드론, 국방연계 연구 등등, 그리고 소재부품도...?)

(5) 문제를 드러내는 데 인색해서는 변화는 없다

지난 20여 년간 소재 및 부품과 핵심 장비 내재화를 위해 수십조 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성과가 별로 없다고 판단한다면 왜 그런지부터 밝혀야 한다. 산학연 따로 국밥과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가성비 열세로 대부분 모래처럼 사라졌다면 그렇게 된 의사결정 시스템 자체에 대한 회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향적 대안 형성도, 대안의 적합성 판단도 무리다.

‘소재부품기술개발사업’ 예산이 들어간 사업들의 경우, 그 자체로는 높은 평가를 받고서도 조용히 사라진 것들이 수없이 많다. ‘사업은 우수했으나, 정부시책에 의해 어쩔 수 없이’라고 적시된 경우도 많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이른바 ‘전문가 위원회’가 이 일을 하는데, 이 위원회도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부닥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문제의 근원을 따져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실패를 반복하거나 또다시 재원 배분 논의로 넘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편한 길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드러낸다는 것은 책임소재로 연결되기 쉽다. 따라서 문제를 드러내지 않게 된다. 그러니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대안

(1) 단기/첨단 소재부품 War Room 설치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원로 연구자들의 의견은 이렇다. “이번 소재부품 문제는 기존의 국가 R&D 체계로는 해결 불가능합니다. 정부와 산업체를 넘나들어 활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제도에 구속받지 않고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는 강력한 TF(Tack Force)가 가동되어야 합니다.” (손정락 연구위원, 기계연), “이번에 문제가 된 상당수의 소재부품들은 이미 정부 R&D를 통해 과거에 개발되었던 것들입니다. 기술 개발이 관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송영훈 본부장, 기계연)

전술한 경계할 조건 다섯 가지를 고려할 때 필자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기존의 부처 중심 문제 해결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학계와 국가연구소의 역량을 결집한 첨단 소재부품장비 ‘작전지휘본부’를 두자는 의미이다. 대기업 수요 연계형 개발과 국방 수요 연계형, 국제공조형 등의 트랙에 있어서 특정 우선 집중 항목을 선택하고 국가역량을 결집하여 집중적으로 해결하는 전략거점을 설치해보는 게 어떤가. 기존의 부처 주도 주제 발굴-전략 발굴 방식과 획기적으로 다른, 특징적이고 제한적인 문제 해결을 장기간 동안(5~10년) 전담하는 형태로서의 PM(Project Manager) 중심의 전적인 위임을 보장해 보자.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미국 DARPA의 60년 성공 비결도 바로 PM의 발굴, 전권 위임, 조직 관료화 경계가 핵심이다.

PM 제도 또한 지난 십여 년간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었지만 실패한 원인이 정확히 진단되지 않고 있다. PM에 전권을 위임하는 제도와 여건 조성에 실패하고 기존의 정부 중심 이해관계 기관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로 제한한 채 이름만 PM으로 불러온 것이 핵심 원인이다. (국방 및 민간 부분 관련 정책 도입 실무진 인터뷰 결과)

제안하는 War Room에서 국가적 기술역량과 전략의 연결 기획자로 일할 PM은 이전과 달라야 한다. 특히, 절차적 정당성에서 과감하게 해방되어 위임된 권한과 그 활동 여건 모두에서 강력한 자율 권한을 제공하되, 이들의 성과와 과정은 산학연 국가전문가 네트워크에 지속적으로 공개-교류하게 하고, 그 강력한 권한에 합당한 전략적 책임성을 이렇게 구성된 민간 전문가들과의 정보교류 속에서 자체적으로 평가-검증되는 것을 기본 운영체제로 하면 관료화와 밀실주의 폐해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교류의 과정에서 미래의 새로운 PM도 성장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련 기구의 존재와 추진성과를 떠벌리지 않고 비공개적으로 하는 방식이기를 희망해 본다. WTO 제소나 기술 소유권 문제도 비켜갈 수 있는 강력한 추진체계의 가동을 제안한다.

(2) 중기/국가 위험지수 관리 지표의 발굴과 과학적 관리 체제의 구축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 중국 소재 의존 문제를 우려하여 2001년 국가 차원에서 관련 조직을 모두 모아 ‘물질재료연구소’를 만들었다. 반면 우리는 자유시장경제체제가 지속되리라는 가정 속에 R&D 예산 투입 증액 외에는 시장기제에 방치했다. 바로 국가 거시전략에 대한 안이함이 우리 안에 깊이 인이 박혀있음을 시사한다.

소재부품의 대일 의존도와 같은 수준으로 관리되지 않고 있는 국가적 위험지표로 국방-항공 우주 분야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와 유사한 규모의 기계-전자 산업 국가 중 독특하다고 할 정도로 대외의존도가 높다. 그때그때 필요한 무기체계를 국내 개발할지 또는 해외 도입 할지에 대해서는 엄정한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을 해오긴 왔지만, 오랜 기간 누적된 의사결정들의 총합적인 결과는 중장기적인 국가전략 부재의 부끄러운 실상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주요국들은 국방-항공 우주 관련 부품과 시스템은 국산 제품을 우선하도록 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으나 (예. 미국의 BAA 제도), 우리는 그런 열강의 사례를 바라보면서도 관련 제도를 도입하자는 전략적 어젠다를 제기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제도적 불완전 속에 획득사업마다 국산화냐 해외 도입이냐에 관한 정치게임 판이 벌어지다 보니, 전략적인 대응보다는 전술적 대응에 그치고 낮은 단계의 책임공방에 정책담론이 소모되었다.

해외의 우수한 정책으로부터도 근원적인 교훈을 길어내지 못한다면 국가전략이 진화하기란 요원하다. 위 그림은 각 국가별 국방비 지출 규모와 항공우주 산업 규모를 비교한 것으로서, 현대전에서 국방 무기체계의 핵심을 항공 우주가 차지하는 특성으로 인해, 국방 부분의 대외의존도를 항공 우주 매출 규모와 국방비 규모의 상관관계로 추정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핵심부품과 기술의 대외의존도가 높을수록 국방비 규모는 늘어나도 국방부문의 대외의존도가 해소되지 않는 악순환에 빠져들게 된다. 이 도표를 지난 20년간의 이력으로 추적해 보면 한국의 위치(국방비 대비 항공 우주 매출 규모가 10%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또한, 국방-항공 우주 관련 특정적인 핵심부품 그룹에 속한 부품만을 별도로 구별하여 대외의존도를 살펴보면 지난 삼십 년간 국가 차원의 과감한 예산 증액, 투자에도 불구하고 대외 의존도가 거의 변동이 없거나 오히려 더 늘어난 역설이 나타난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비즈니스 운영을 위해 글로벌 아웃소싱했다는 논리적 정당성이라도 있지만, 국방-항공 우주 부문의 개발에 있어서 핵심부품과 역량의 내부화와 산업 역량 유지를 우선하지 않고 외국 기술, 제품에 의존한 것은 ‘안보 시급성’ 논리나 방사청의 전략기획 능력의 제한/부실 외에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시급하단 핑계를 삼십여 년간 지속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가적 전략 지표나 통계가 과장-축소-왜곡되어 온 탓에 의사결정이 지연되거나 방치된 사안들이 이 외에도 상당할 것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연합이 한 목소리로 십여 년간 외쳐서 겨우 반영되었던 항공정비사업(MRO)과 같은 사안은 그 실행 과정에서 특정 거물급 정치인의 개입으로 거시적 전략이 송두리째 왜곡되어 ‘지역구 챙기기’로 전락하였고 뜻있는 관료도 막을 수 없었다.

과감한 정부의 투자에는 바로 이러한 복병까지 도사리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러한 관행적 거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예산 축소-확대 문제로 돌리거나, 정권 탓으로 돌리는 행태부터 멈추어야 한다. 언론이 그렇게 낮은 수준에 머물고, 정치권력자들은 시급한 문제 혹은 뿌리가 허약한 거대한 개념만 좇는다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되기 위한 변혁은 요원하다.

(3) 장기

경제적 성과, 경제적 파급효과에 매몰된 과거 관행에서 탈피하여 첨단 기술, 부품, 소재, 장비 역량을 전략적으로 축적하는 것 자체에 가치 부여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지금 산업전략적 우선순위를 특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내재화 전략에 부합하면 단위과제 중심의 운영을 벗어나 ‘될 때까지 추진한다’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톱 다운의 국가전략이 보편화되면, 출연연구소들의 기능과 역할도 절로 쇄신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현실은 정반대였다. 톱다운의 국가전략 제시보다는 바텀 업의 파편적 아이디어/과제 수렴이 전부였다.

현 정부 들어 정부 출연연구소들의 화두가 ‘임무 재정립’과 ‘자율과 책임’이다. 이 세 가지 단어는 잘못 배열된 것이다. 국가 차원의 ‘임무와 자율’의 경계 설정이 중심 화두로서 먼저 제기됐어야 한다. 임무부여의 공간 속에서 자율은 의미를 갖는 것이고, 그래야 책임의 기준이 성립되는 것이다. 현재 2년 동안 진행된 관련 제도 개혁은 자율에 관한 논의는 부재하고, 임무는 부여가 아닌 출연연이 스스로 알아서 재정의 해보는 수준이었다. ‘임무와 자율’의 설정에서부터 모호하니 책임성이 뚜렷해지고 출연연의 역할에 새로운 전기가 되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국가 차원의 혁신역량의 결집의 방정식 찾기”로 재정의 한다면, 출연연이 개별 기관 이기주의를 넘어 국가 차원의 싱크탱크 역할을 소신껏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개혁의 한 축이어야 한다. 연구자들의 연구의욕과 열망 자체를 국가 자산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중앙 부처의 장점인 안정적-포괄적-형평성 중심의 대안과 출연연 중심의 도전적-선택적-전문적 대안이 ‘혁신 경로의 다원성’이라는 가치 속에서 경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위 전략으로 전제할 필요가 있다. 모처럼 찾아온 국가 전략적 패러다임 전환의 기회가 또 다른 예산 잔치로 끝나지 않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의 과학기술 토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한다. 새로운 첨단산업 기술 전쟁은 기술 전쟁이 아닌, 정치 리더십의 전쟁이다.

# 다시 기본으로

수치로 나타나는 우리 기술 개발 성과는 상당히 훌륭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소재부품 분야 SCI 논문 성과는 세계 3위에 이른다. 하지만 사업화 성과 측면에서 보면, 해외 글로벌 기업(일본, 미국, 독일 등)의 가성비 높은 부품∙소재∙장비에 의존을 지속해 왔다. 다시 말해 개별 과제나 연구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개별 과제를 연결한 종합 성과나 사업화라는 관점에서는 전혀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알고 있는 정부도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어왔다. 자유시장 경쟁 체제에서 사업화 단계까지 지나치게 개입하면 민간의 혁신의 피가 도리어 말라 버리고 구축효과 (crowd out)가 발생하여 기업의 정부 의존성이 더 커지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니 기획 단계에 도전성과 대중소 기업 간의 협력형을 강조하여 왔지만, 번번이 그 결과는 기술 개발에는 성공 사업화는 실패로 이어져 왔다. 이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기술이전 지원조직 강화, 기술이전료 특혜 부여, 민간투자 연계 사업화 지원 사업 확대 등과 같은 적극 정책을 펼쳤으나 주어진 거버넌스 속에서는 이미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지난 8월 5일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발표했다. (출처: 연합뉴스)

정책 일선에서는 이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예산을 늘리는 것보다는 이미 국내에 충분히 존재하는 역량과 수요를 상호 연결하고 협력하도록 하는 ‘협력적 혁신 기제’ 형성이 관건이라는 점은 연구자들뿐 아니라 정부도 알고 있다. 지난 8월 5일 정부 긴급 발표에도 협력 시스템 구축을 위한 ‘4가지 모델’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또 이전에도 역량을 갖춘 민간 전문가들을 활용하기 위한 여러 제도가 시도되었다. PD, PM 제도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혁신 난제 해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정부가 필요로 하는 손발 역할로 한정되고 말았다.

8월 5일 정부 발표에는 실로 방대한 내용이 담겼다. 인허가 기간 절차 축소, 연장·재량 근로 활성화, 세제·규제특례, 경쟁력위원회, 소재부품 특별법 전면 개편, 수요-공급기업 간 수직적 협력 모델과 수요기업 기술 로드맵 공유 등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포함됐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이 빠졌다. 과거의 실패로부터 전략적/정책적 교훈이 반영되지 않은 채 무언가 새로워 보이는 것을 하나 더 얹거나, 혹은 과거에 실패한 경로를 단지 미세 조율하는 것으로 되풀이하려는 것이라는 느낌. 왜 그럴까? 다시 상위 전략을 말하고 싶다. 상위 전략이 부재하다면 하위 실무진의 ‘열심’은 소용없는 일이다. ‘위대한 실패’에 박수쳐주고, 실패 다음 단계에서 무엇을 진화 주제 연결-승계할 것인가에 관한 가치 중심적 접근,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상위 전략의 구축이 핵심이다.

이번 도전은 국가 주도 혁신체제의 거버넌스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데 모아져야 한다. 현재와 같이 PBS(Project Base System, 과제 승인에 따라 예산을 지원하는 제도) 중심의 거버넌스에 포획된 체제에서는, 정부 출연연구소나 대학이나 국가 혁신 생태계 속에서 산학연의 전략적 거점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들 경쟁자이거나 잠시 정부과제 수탁을 위한 일시적 동행자일 뿐이다.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채로, 또 다른 산학연 협의체가 거론되고 있다. 거버넌스 개혁의 필요성에 눈을 뜰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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