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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징비록’ 현장에서 한·일 관계를 돌아보다

작성자 : 남중수(전 KT 사장) 2019.07.25 조회수 : 5027

‘징비록’ 현장에서 한·일 관계를 돌아보다


“과거와 현재가 싸워 미래를 망가뜨려선 안돼” 

-한·일 문화적 유사성, AI 로봇 스마트팩토리 협력 가능성 커



남중수(전 KT 사장)


필자는 외가인 안동 하회마을을 자주 간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인 서애 류성룡이 영의정 관직을 마치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낸 곳이다. 서애는 임란 전 지은 하회마을의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임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집필하였다. 최근에 일본 메이지(明治)유신의 발원지인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다녀왔기 때문인지, 옥연정사에 올라서서 조용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와 하회마을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이 흘러들었다.


에너지 안보 대책은 있는가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려는 자세와 변화하는 시대에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충분한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변화무쌍한 국제 정치와 국제 경제 환경 하에서 아직도 우리는 낡은 사고 속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국내 양극화를 성급하게 해결하려다 글로벌 양극화의 희생이 될 위험은 없는가? 미국이 셰일혁명 성공 등 여러 요인으로 고립주의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는 상황에서 중동 석유 확보 등 에너지 안보에 대한 대책은 있는가? (피터 자이한은 ‘셰일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라는 책의 한국 독자를 위한 별도 서문에서 한국은 대책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일본은 1868년 시작된 메이지유신을 통해 사회, 경제의 모든 면이 빠르게 근대화, 선진화되었다. 반면 한국은 1960년대 이후에나 경제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우리가 선진화에 뒤쳐진 부분을 간단한 사례로 보자. 지하철 개통 시기는 영국 1863년, 미국 1898년, 일본 1927년, 한국 1974년이다. 영국보다는 111년, 미국에 비해 76년, 일본에 비해 47년 뒤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IT 분야에서는 우리가 앞선 분야도 많았다. 지하철에서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해졌던 때는 한국이 1996년이었다. 반면 미국 2012년, 일본 2013년이었고 영국은 올 들어서야 비로소 이 길에 들어섰다.

이렇게 뒤늦게 시작했지만 앞서가는 것이 있고, 앞섰다고 생각했지만 뒤쳐지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전자정부 서비스는 IT 강국인 한국의 실력으로 글로벌 IT 시장을 창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지체하는 사이에 후발주자로 뒤쳐졌다. VOIP(인터넷 전화) 기술은 한때 한국 기업 새롬기술의 다이얼패드(Dial Pad)가 가장 앞섰다. 다이얼패드의 VOIP 기술은 인터넷 음성기술의 기준이 되었고, 4G/5G의 근간이 되어 전 세계가 쓰고 있다. 다이얼패드 VOIP 서비스를 한국이 처음 개발했지만, 지금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몫은 거의 없다. IPTV 서비스가 이해관계자의 반대와 정부의 규제로 일찍 시작하지 못해 IPTV 관련 산업의 글로벌 진출 기회를 놓쳤듯이 이런 예는 현재도 분야별로 부지기수다. 지금 한일 관계도 과거에 규정되어진 사고(판)에서 과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새로운 판을 만들지 않으면 과거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기존에 만들어진 판 위에서는 능력을 잘 발휘하지만, 새로운 판을 만들어서 펼쳐 나가는 능력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새로운 판을 펼치려면 기존 개념의 확장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이를 뛰어넘는 변혁적 사고(Disruptive Thinking)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기존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판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냥 과거의 규정된 사고 속에 머물러 그 판위에서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전자정부라는 기존 개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개념의 전자정부를 공격적으로 구현해 왔다면, 우리의 전자정부 서비스는 글로벌 시장에서 반도체 메모리 사업에 대한 입지만큼이나 월등 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정부 규제와 이 규제를 돌파하지 못한 기업의 한계가 있었다. 다이얼패드 VOIP 서비스도 기존 통신의 규제를 풀고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면 우리 입지도 그만큼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그것이 한일 관계이건, IT 기술이건, 과거의 사고, 판, 프레임에 규정되지 않은 새로운 판을 만들어 가야 한다.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넘어 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놀이판을 새로 짜는 것이고, 주어진 현재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놀이판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그럴 능력이 있다. 이제 우리 마음 자세만 조금 바꾸면 된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판을 앞서 만들면 된다.

지난 3월 1일은 3.1절 100주년이었다. 우리 선조들의 독립정신 및 희생정신을 기리는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왜 일제 치하의 어려움과 수모를 겪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 분석은 미흡했다. 후손이 다시는 이러한 치욕을 겪지 않도록, 또 다른 징비록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16세기 銀 제련술, 판을 바꿀 기회 놓친 朝鮮

우리가 국가 발전의 기회를 놓친 사례를 시대 순으로 몇 가지 더듬어 보자.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1503년) 함경도 단청의 양인(良人)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은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을 개발했다. 납광석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만드는 제련 기술이었다. 당시의 은은 지금의 석유나 달러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중종반정(1506년)으로 이 기술은 조선에서 금지되었다. 일본이 이 기술을 가져가서 은 제련 산업의 발전을 이루어 부국의 기반을 마련한다. 당시 일본 다이묘들은 이 기술을 활용해 경쟁적으로 은을 축적했고 임진왜란 전인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 기술이 제대로 받아들여져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더라면 조선의 국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조선이 판을 바꿀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도자기 기술도 일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에 대한 예우는 조선과 너무 달랐다. 도공들은 조선으로 귀국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가족과 친지들까지 일본으로 초청해 데리고 갔다. 이들로 인해 일본은 고품질의 도자기를 본격 생산해서 유럽에 수출하게 된다. 태평양전쟁 종전 시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도공 박평의의 후손이다. 또한 정한론(征韓論-1870년대 전후)의 본거지인 사쓰마, 조슈 지역은 한국계 후손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는 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조선 정부는 1653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Hamel)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반면 일본 막부는 쇄국 정책을 쓰는 가운데도 나가사키 데지마 지역 한곳을 열었다. 이곳에서 교역이 일어나고 서양 문물이 들어왔다. 이것이 후에 메이지유신의 기반이 된 난학(蘭學)을 일으켰다. 또한 이를 통해 세계 동향을 파악하고 미국 페리 함대의 내항을 사전 예측했으며 중국 아편전쟁의 영향을 분석했고 러시아 팽창에 대비하였다.



조선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쓴 임진왜란 야사, 징비록(懲毖錄)


禁書가 됐던 징비록

일본은 막부 차원에서 홋카이도 지역을 영토화하려 노력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 숙종(1693년) 조정은 영토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였는데, 안용복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안용복은 일본에 나포된 울산의 어부였는데 일본 정부에 독도가 조선 땅임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여러 논란 끝에 무단 월경죄 등을 물어 안용복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임진왜란(1592년)의 교훈인 징비록은 금서로 하며 읽지 않고, 제갈량의 출사표만 들먹이며 망한 명나라만 의지하다가 병자호란(1636년)을 당하였다. 위정자들이 세계정세에 어둡고 국가 발전의 원리를 망각하고 국부를 키우는 방법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과거를 잊지 말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한 외교 관계와 전략은 더욱 중요하다. 외교 관계는 국가 간 이해득실을 따지며 수시로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미국과 일본은 1941년부터 태평양전쟁으로 싸웠지만 동서 냉전이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5년 후에는 우방이 되었다.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호위함 가가호에 올라 미일 동맹을 과시했다. (가가호는 진주만 공습을 주도했던 항공모함과 같은 이름이다.) 미국은 1946년에 장개석의 중국과 우방이었지만 모택동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적국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 고립을 위해 1979년 국교를 맺었다가 이제 40년 만에 다시 치열한 경쟁 관계, 사실상의 적국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도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우방이었으나 1950년대부터 적국이 되었다. 우리도 6.25 전쟁 시에 북한을 지원하는 중국과 전쟁을 하였지만 40년이 지난 1992년에 국교 수교를 하고 지금은 비중 1위인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필자는 외교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급변하는 국제 환경과 질서 속에서 지금 벌어지고 일들이 걱정스럽다. 만일 한일 간에 갈등이 커져 제3국 의견이 중요할 때 미국, 영국 등을 포함 과연 얼마나 많은 국가가 한국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지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달 영국의 앤드류 왕자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하회마을 방문 20년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하회마을을 다시 찾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약 110년 전 구한말에 영국은 일본과 동맹으로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는데 간접적으로 도운 나라이다. 과거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이나 영일동맹(1902)과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되겠다.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고 하지만 일본과는 80여 년 전의 아픈 관계로 계속 머물러야 하는가? 미중 사이에서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더욱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우리가 중동 지역 등에서 에너지를 확보하려면 호르무즈 해협과 말래카 해협, 남중국해 등에서 원유 수송을 위한 해군력이 필요하고 이 경우에 일본과 공동 협력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미중일간의 역학관계에서 일본과의 전략적인 관계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스마트 팩토리도 독일보다 

일본과 협력 가능성이 더 커

한국과 일본은 지금 최악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불거진 문제는 그것대로 해결해 나가야 하겠지만 미래의 가능성은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 산업 분야만 보더라도 한일이 협력해서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분야는 너무나 많다. ICT 영역에서 몇 가지만 언급하면, 4차 산업혁명의 기본이 되는 인공지능(AI), 스마트 공장(Smart Factory), 로봇(Robotics) 등과 같은 ICT 기술이다. AI의 경우 중요한 것이 알고리즘과 데이터이다. 알고리즘 개발은 미국, 유럽 국가들과 함께 한다 하여도 더 어려운 것은 데이터이다. 아무리 좋은 알고리즘이라 하여도 데이터가 부족하면 AI는 성능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동양인 얼굴 인식을 위하여 서양인 얼굴 데이터를 사용하면 AI의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음성인식이나 마케팅에 활용하는 사회, 문화적 데이터 분석도 마찬가지이다. AI 적용에는 데이터 유사성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스마트 팩토리도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미국과 유럽의 공장은 한국과 일본의 공장과는 그 성격과 운영에서 차이를 보인다. 잘 만들어진 스마트 팩토리 기술이라 하더라도 미국과 유럽에 적합한 것이 한국과 일본에 적합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 문화, 역사적으로 동질성이 있는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여 우리에게 맞는 스마트 팩토리를 개발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한국과 일본이 함께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다. 생산현장에서 사용하는 로보틱스(Robotics)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과 일본이 생산현장에서 로봇을 활용하는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 이 두 나라가 협력하면 생산현장을 위한 로보틱스 분야에서 세계를 따돌릴 수 있다. 분명 중국도 유력한 협력 대상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런 ICT 분야에 있어서 우리와 협력이 어려울 수 있다. 중-일 협력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과 일본이 ICT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넓혀야 한다. 성과도 빨리, 어렵지 않게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또 하나의 판을 만드는 것이다.


미래 협력의 기회 막지 말아야

임진왜란의 힘든 경험을 후손들이 다시 겪지 않도록,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 서애가 집필한 징비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숙주가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성종에게 "일본과 실화(失和) 하지 마옵소서"라고 진언한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고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후손들에게 미래 협력의 기회를 막는 우를 범해서도 안된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도 상대방 입장에 서서 판을 바꾸는 사고를 하면 다양한 해법이 나올 수 있다. 과거를 잊지 말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영국의 처칠이 말했듯이 과거와 현재가 싸워 미래를 망가뜨려서도 안 된다. 옥연정사에 서서 쇼카손주쿠를 생각하며 500년 전, 150년 전, 그리고 현재가 지나간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반드시 역사가 보복한다’(알렉시스 드 토크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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