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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공동체 DNA’를 몸에 각인시킨 중국 流民들의 ‘900명 살림집’ - 그들이 華僑로 뻗어나가 이광요를 낳고 탁신을 낳았다

윤태옥 (중국여행객)

2019.06.14

윤태옥은 미디어 엘리트였다. M.NET 편성국장을 거쳐 팍스인슈 대표가 마지막 직함이었다. 마흔넷이던 2006년, 홀연히 중국으로 떠났다. “낡은 능력을 조금씩 보수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4년째, 한국에서 1년의 절반을 살고 나머지 절반은 중국을 여행한다. ‘중국음식기행-중국식객’을 거쳐 ‘중국민가기행-당신은 어쩌자고 허락도 없이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를 썼다.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도 남겼다. 윤태옥은 스스로 ‘중국여행객’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여행가’도 아니고 ‘저술가’도 아니다. 그저 여행객이다. 여행가(家)가 너무 과분하기 때문이라 한다.

윤태옥이 중국에서 역사상 5차례의 큰 전란을 피해 떠돌던 流民들이 정착한 곳, 후에 동남아와 유럽에서 華僑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의 고향인 객가(客家-hakka)의 공동체 문화와 독특한 집체 주거문화에 관한 글을 보내왔다.

중원 戰亂 피해 수천리길 남으로 남으로

공동체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이다. 현대에 와서 개인을 강조하는 사조가 주류를 이룬다고 해도 그것 역시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개인이 공동체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실감하는 것은 가정과 국가일 것 같다. 가족은 일생에 걸친 공동체요, 국가는 개인을 둘러싼 법과 제도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면 더욱 실감하는 ‘내가 속한 공동체’도 가정과 국가 아닐까. 향수는 시종 가족을 맴도는 마음고생이고, 여권은 개인을 국가별로 구분하여 증명하는 필수 휴대품이다.

공동체의 또 다른 실체는 건축물이라 할 수도 있다. 가정은 집이라는 주거공간에 가족 구성원들이 모임으로써 성립된다. 국가라는 법과 제도는 마을과 도시, 도로와 같은 구축물의 집체를 국경선으로 둘러싸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집 옆에 집이 있으니 이웃이라 하고, 이웃집들이 길게 늘어서니 길이 나고, 길이 넓어지니 광장이다. 광장에 사람이 모이고 시장이 선다. 그것을 하나로 묶는 성벽을 두르니 도시[城]가 되고, 성문과 성문을 이으니 지역 공동체가 된다. 이들 층위가 다른 각각의 공동체들과 그것들을 아우르는 권력체계의 묶음을 국가라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사람은 혼자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니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는 그 공동체에 맞는 건축-구축물군(群)에 담기게 된다. 자연부락이라 해도 순수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낸 인공 구축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을과 도시는 거주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세월을 쌓아 만든 것’이지만, 촌락과 도시의 구조나 형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의식화’시키기도 한다.

나는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백성들이 사는 전통적인 살림집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 가운데 공동체 의식이 강하게 적용된 주택이 인상 깊게 남아 있으니 객가인들의 토루(土樓)와 조루(碉樓)가 바로 그것이다. 객가인들의 작은 마을이 단체(單體-한 덩어리) 주택에 담긴 것이 토루이고, 조루는 화교라는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낸 주택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한 채에 최대 1~200 가구까지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어진 원형 토루(土樓)

토루는 항토장(夯土墻)이라고 하는 두꺼운 흙벽을 두르고 있는 주택이다. 항토장은 웬만한 충격으로는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3~5층의 정사각형, 직사각형 또는 원형의 주택으로, 한 채에 수십에서 1~200 가구가 살 수 있다. 멀리서 봐도, 대문에 들어서서 보아도 집이라기보다는 성채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TV 다큐멘터리에서 가끔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토루의 특징은 하나의 향촌 주민이 전부 함께 사는 집체성 주택으로 방어성이 상당히 강조된 특징이 있다. 연원으로 보면 중원의 전란을 피해 남천(南遷)해온 유민들이 집단 거주 주택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는 전란과 재해로 인한 대규모 유민이 역사상 다섯 차례 발생했다. 대부분은 북에서 남으로의 이동이었다.

5차례 걸친 流民의 시대

1차는 한나라가 멸망하여 혼란이 극심해지고, 삼국이 쟁투를 벌이다가 위나라로 통일은 됐으나 곧이어 다섯 북방 민족들[五胡]이 중원을 휘저은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2차는 당나라가 기울면서 안사의 난, 황소의 난에 이어진 5대 10국의 혼란기. 3차는 송나라가 거란과 여진족에 눌려 창강 건너 항저우로 주저앉고, 몽골 제국이 다시 남하하여 그마저도 멸망시킨 시기이다. 4차는 명나라가 말기 혼란에 빠졌던 시기이고, 5차는 청조가 쇠락하며 서구 제국주의가 침략하고 태평천국(1851~1864)의 난이 대륙을 휩쓸던 시기이다.

대규모 유민 사태는 기존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혼란기에 발생한다.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 정치를 개혁해 전반적인 생산력도 증가하고 인구도 늘어난다. 그러나 왕조의 안정기를 지나면서 지도층은 점차 기력을 상실하고 관료는 부패하면서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모순이 깊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재해나 이민족의 침입과 같은 외부 요인이 충격을 가하면 권력층은 사분오열하고, 생존이 위험해진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면 극도의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혼란기에 백성들은 전란을 피해 농토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돌기 일쑤이다. 이 가운데 남으로 남으로 흘러온 유민들이 객가인의 선조들이다. 고향과 농토를 버리고 남천을 감행한 이들은 창강을 건너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가곤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주한 지역의 하나가 장시성, 푸젠성, 광둥성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객가 조상의 땅[客家祖地]라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유민들의 거대한 살림집, 한 마을이 모두 한 집에 모여 사는 집이 바로 토루이다.

혼란기에 대규모로 발생한 유민들이 장시성, 푸젠성, 광둥성이 교차하는 지역에 자리를 잡으며 모두 한 집에 모여사는 형태의 토루를 만들었다.

토루의 가장 큰 특징은 적의 침입에 대항하는 자체적인 방어성이 크게 강조되어 있고, 거주인들 사이에는 혈연 지연이 응축된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주든 정착이든 힘을 합치는 것이 생존의 필수조건이었으니 집체성 주택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집을 지을 때에는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고 당장의 필요 보다 큰 집을 짓기도 했다. 일례로 청조 초기 열 명의 가족이 방 64칸짜리 4층 토루를 지었는데, 그 집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 토루의 거주자는 한때 20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여러 가족이 공사비를 염출하여 지은 또 하나의 4층 토루는 방이 288칸이나 됐고, 최대 900여 명이 살기도 했다.

전체 방들이 표준화 통일화된 것도 집체성의 한 단면이다. 1층에서 4층까지의 아래위 한 칸을 한 가구가 사용한다. 1층은 주방이고 2층 이상은 침실과 창고 등으로 활용한다. 토루의 가운데 마당에는 조당(祖堂)을 세운다. 마을에 처음 발을 디뎠거나 토루를 신축한 조상을 모시는 게 보통이다. 공동체의 의식이 직접 구현된 것이다.

방어 기능에 집중된 폐쇄적 구조

방어 기능은 놀랄 정도이다. 도적떼가 적지 않았지만 황제의 군대는 멀기만 했고, 촌락 사이의 다툼도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내부로는 탁 트였지만 외벽은 벽체가 두껍고 단단한 데다가 창문도 거의 없다. 한눈에 보아도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구조이다. 외벽은 땅을 파낸 다음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거푸집을 세워 점성이 있는 홍토(紅土), 석회, 자갈을 섞어 넣은 다음 나무절구로 다져서 쌓아 올린다. 중요한 부위에는 찹쌀밥, 흑설탕 등을 추가하여 점성을 높이는데 이렇게 하면 못을 박기도 어려울 만큼 견고해진다. 하단 폭이 150cm 정도로 두꺼워서 웬만한 충격도 견딜 수 있다.

제일 위층에는 토루 전체를 돌 수 있는 복도를 만들고 복도 곳곳에 작은 창이나 구멍을 만들기도 한다. 외부의 적을 감시하거나 총을 쏘기 위한 것이다. 대문은 적의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에 방어성능을 특별하게 보강한다. 대문은 하나만 만들고, 10~20cm 두께의 튼튼한 목판으로 문짝을 만든다. 문짝 바깥 면에는 철판을 덧대기도 한다. 화공(火攻)에 대비해 대문 위쪽에 방화수 시설을 한 것도 있다. 외부에서 큰 충격을 가해도 열리지 않게 문짝 안으로 튼튼한 빗장을 가로지를 뿐 아니라 굵은 통나무 두 개를 문짝에 직각이 되게끔 받치기도 한다. 마당에는 필히 우물을 판다. 장기간 포위되어도 견딜 수 있는 식수원이다.

토루도 시대에 따라 건축구조의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정사각형이 많았고 훗날 사회가 점차 안정화하면서 개방성이 강조된 직사각형으로, 건축기술이 발전하면서 원형으로 변해갔다. 원형 토루는 지진에 강한 구조였고, 구석의 사각이 생기지 않아 주거공간을 최대로 확보한다는 면에서도 유리했다. 모든 칸이 동일하기 때문에 방을 배정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이렇게 공동체 성격이 강조된 단체(單體) 주택은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흔히 보는 성들이 성벽을 두른 것도 공동체의 물리적 표시이지만 토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혈연과 지연 내지 생존 공동체가 강조된 주거환경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사람들은 공동체 문화의 유전자가 강하게 몸에 배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토루의 주인인 객가인들이 그런 면모가 더 강하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남아와 유럽 화교의 주축이 객가

객가인들은 누구인가. 중국은 자국 내의 민족을 91.5%의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분류한다. 객가인은 소수민족이 아니라 한족에 속한다. 한족은 수천 년 역사를 통해 90여 개 민족이 융합된 민족으로, 오래전부터 혈연이라기보다는 국적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 한족을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 개념에 등치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하여 한족은 민계(民系)라는 하위 범주로 다시 세분하게 된다. 한족은 여덟 개 또는 열여섯 개의 민계로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객가인이다.

그런데 객가인들은 스스로를 객가라고 불렀을까. 처음부터 스스로를 객(客)이라 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조 초기에 기존 토착민들과 새로 밀려들어온 객가인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을 때 토적(土籍)과 객적(客籍)으로 구분하는 말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타칭이었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민족학과 객가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뤄샹린(羅香林 1906~1978)이란 학자가 객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말을 객가인들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일반화됐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객가라는 말을 거부하고 애인(涯人)이라고 하기도 했었다. 이 말은 객가인 언어에서 사용되는 일인칭에서 비롯된 말이다.

객가인들이 손님들에게 호의를 갖고 기꺼이 맞이하면서, 우리 집은 손님이 머물 수 있는 집이란 뜻에서 스스로 낮춰 객가로 표현한 말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객가인들이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고 하지만, 살던 곳을 떠나 스스로 객이 되기를 마다하지도 않았다. 유민의 후손이라 외지에 나가 새로운 삶을 펼치는 것이 몸에 밴 것일까. 그들은 타이완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또다시 미주와 유럽으로 이민을 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태양이 있는 어디에나 객가인과 그들의 마을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바로 화교(華僑)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화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둥성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동남아와 서구의 화교에서는 객가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화교 특유의 공동체 문화의 뿌리

객가인이 많은 화교 사회는 객가인들의 토루만큼이나 공동체 문화가 강한 것을 종종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중국 땅에서 살기 힘들어 객지로 나갔지만, 일단 자리를 잡게 되면 형제부터 친지까지 하나둘씩 불러온다. 그렇게 형성된 화교 사회는 결속 연대 협업 분업 육성 등등의 키워드로 연결된다. 혈연 지연에 동업조합 성격이 가미된 강력한 공동체로 타국에서 생존하고 번영한 집단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라 고향에서의 전통문화에 더 애착을 갖고 원형에 가깝게 보전하기도 한다. 본토에서는 이미 변해버린 전통문화가 이주민 사회에서는 그대로인 사례를 종종 보게 된다. 이런 향수는 고향으로의 인적 물적 회귀로 나타난다.

공용의 망루를 설치, 촌락 전체의 공동방어 기능이 강조된 형태의 조루(碉樓)

19세기 말 귀향한 화교들, 가족 단위 안전가옥 만들어

화교들은 자신들이 안정되면 고향에 돈을 보내 친척들까지 먹여 살리기도 한다. 객지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귀향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광둥성 일대에는 화교들이 보내온 돈으로 조루(碉樓)라고 하는 망루형 주택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조루는 화교들이 이민생활에서 보았던 멋진 서양 주택을 차용한 것이 많다. 그리하여 서양 주택처럼 보이는데 이를 중서합벽(中西合壁)이라고 한다.

조루는 카이핑(開平) 허산(鶴山) 신후이(新會) 타이산(台山) 언핑(恩平) 등 광저우시 서남쪽에 있는 장먼시(江門市)의 다섯 개 지역[五邑]에 밀집되어 있다. 이 지역을 교향(僑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지역 출신의 화교가 많았고, 언어나 문화 등의 동질성도 강해 오읍이라는 말로 통칭하는 것이다.

조루는 공동체의 보전과 방어성이라는 면에서 토루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루는 4~5층의 망루 형태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전반 중국 전역의 치안은 불안했고, 화교의 친척들은 도적떼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거주지와 주택에도 외적에 대한 방어성이 토루와 마찬가지로 크게 강조되었다. 그러나 토루와는 달리 가구별 주택이 자체 방어를 우선하는 식이었고, 공용의 망루를 설치해 촌락 전체의 공동방어 기능을 병행하고 있다. 이미 화교 생활에서 생성되기 시작한 가족별 세대별 분화라는 시대적 흐름이 반영된 것이다.

1층 현관문은 문짝을 철판으로 덮는다. 창문은 바깥쪽에 쇠창살을 설치하고 다시 철판으로 덮을 수 있게 했다. 고층부나 옥상에는 연자와(燕子窩)라 하여 돌출된 베란다를 설치하여 그 바닥에는 사격공을 만들었다. 옥상의 출입문 역시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다. 최후의 순간에는 옥상으로 대피하고는 문을 수평으로 닫아 완전히 봉쇄할 수 있다. 외부의 물리적 위험에 대해 가족 공동체 수준의 방어가 충분히 이루어지게끔 한 것이다. 토루보다 작지만 토루보다 견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조루는 대지면적에 비해 층수가 높아서 대가족 공동체를 수용할 수 있다. 1층 노인, 2층 중년, 3층 신혼부부와 같이 세대별로 구분하여 생활함으로써 전통적인 삼세동당 사세동당이 가능한 구조이다. 대가족이 세대별로 분화되어 가는 세태를 수용하면서도 대가족 공동체를 하나의 주택 안에 품은 것이다. 층마다 부뚜막을 설치한 것도 그렇다. 분조불분가(分竈不分家)라고 하여, 부엌을 나눴을 뿐이지 집안이 갈라진 것은 아니며, 주방이 많으면 아궁이가 많고 아궁이가 많으면 후손이 번성한다(廚房多竈口多人丁旺)는 말로 세태의 변화를 공동체적 가치로 옹호하기도 한다.

19세기 말 단신으로 미국 갔던 謝 씨
고향에 대규모 가족 별장촌 만들어

조루의 하나로, 광둥성 카이핑시에 있는 입원(立園)은 일부러라도 찾아갈 만하다. 입원은 미국 화교인 셰(謝) 씨 집안의 가족 별장이다. 원대에 인근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집안으로 카이핑에서만 7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셰웨유(謝曰佑)는 19세기 말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철도공사판을 거쳐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생활이 안정되자 1906년부터 형제들을 차례로 불렀다. 셰 씨 형제들은 시카고와 고향을 오가면서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결혼은 고향에서 했고 자식을 두고 있다가 1940년대 고향의 가족들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전형적인 부유한 화교 집안이었고, 지금도 후손 300여 명이 미국 캐나다 등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도적떼들에게 시달리다가 1917년 처음 자신들의 조루를 지었고, 1931년부터 주변의 땅을 사들여 별장을 짓기 시작하여 1931년 지금의 별장촌 면모를 이루었다. 멋진 호수도 있고 산책로 역시 잘 만들어져 있고, 중국식 서양식 정자들이 제각기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화원도 풍성한 멋이 넘친다.

입구에 들어서면 조루와 화교 그리고 셰 씨 집안의 가족사를 보여주는 박물관도 있다. 각각의 별장에는 20세기 전반 화교들의 생활상이 전시돼 있다. 셰 씨 집안사람들은 20세기 후반 입원 전체를 중국 정부에 위탁하고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방식으로 일반에게 공개했다.

공동체와 주거문화의 결합이 華商을 낳았을 것

객가인과 화교들은 중국을 떠나 타국에 정주해서 중국과는 다른 차원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싱가포르 수상 이광요도 그렇고, 태국의 탁신 전 총리도 객가인의 후손이라고 한다. 타이완을 거쳐 미국으로 간 중국 역사학의 거성 진인각(陳寅恪)도 객가인이었다. 다소 과장이지만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화상(華商) 네트워크가 21세기의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들의 유민 기질이 만들어낸 것인지, 토루 조루와 같은 공동체적 주거문화가 만들어낸 결과인지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공동체와 주거문화의 강력한 결합이 이들에게서 도드라지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연료든 원료든 미래의 구상에 차출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토루와 조루는 미래도시의 창 안에 작지만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다.

무지한 여행객의 소견으로는, 토루보다 조루가 융통성 있는 주거문화로 눈여겨 살펴볼 여지가 많은 것 같다. 삼세나 사세가 동당(同堂) 하여 살면서도 세대별로 구분함으로써, 전통적인 공동체에 개인주의적 신사조를 반영한 구조가 눈에 뜨인다. 부엌을 나눈 것이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는 것은 필설의 수사학만은 아니다. 그것은 열린 마음으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관용적인 도시건축의 착안점이라고 할 만하다.

조루는 조상의 위패를 제일 위층이나 옥상에 모신다. 홍수에 저층부가 잠겨도 안전하게 존치시키려는 것이다. 토루는 마당의 중앙에 조당을 설치한다. 이런 것들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가치를 건축물에 반영한 것이다. 광장이 단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간을 넘어서서 공동체의 가치를 응축하고 재생산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토루의 높고 단단한 담장은 공동체의 사회안전망
서로 챙겨주는 화교 문화와도 일맥상통

토루의 견고한 항토장은 19세기 말 20세기 전반의 혼란기에 나온 주민 자치적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담장 안에 들어선 이상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된 것이다. 외적으로부터의 안전만이 아니다. 고독사와 같은 극단적인 개인의 몰락으로부터의 안전까지 포함된다. 화교 사회의 동업자적 문화 속에서 신규 진입자들에게 창업의 기회를 주고 육성해주는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안정보(安貞堡) 전경. 안정보의 대문에는 택호의 뜻을 풀어쓴 한 쌍의 대련이 걸려있다.

사회안전망이란 가치가 구현된 토루로서 안정보(安貞堡)라는 건축유산을 찾아볼 수 있다. 안정보는 푸젠성 중부의 싼밍시 화이난향 양터우촌에 있다. 전면은 사각형이고 후면은 타원형으로 된 토루의 한 종류이다. 이런 형태를 후면의 둥근 형태를 부각시켜 위룡옥(圍龍屋)이라고도 한다.

안정보는 건축면적만 5800㎡나 되고, 방이 360여 칸이나 된다. 보(堡)는 작은 성이란 뜻이다. 정면에는 묵직한 철 대문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고, 45m나 되는 전면의 양 끝에는 대포를 설치한 포루(砲樓)가 호위무사처럼 당당하게 돌출돼 있다. 지붕이 한 칸 한 칸 높아지는 층차가 겹쳐 보이고, 지붕의 끝선은 날렵하게 치켜 올라가 있다. 멀리서 보면 등판에 날카로운 가시를 빼곡하게 꼽은 거대한 거북이가 입을 굳게 다물고 웅크린 채 상대방을 응시하는 느낌이다.

안정보는 그 지방의 향신이었던 지 씨 부자(父子)가 사재를 들여서 1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한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집보다 훨씬 큰 집을 지었다. 도적떼가 쳐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안정보로 피신시키고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베풂이 아닌가. 고난이 닥치면 누군가는 한 끼를 도와주고, 누군가는 하룻밤을 도와주고, 누군가는 고난의 근본을 고쳐나가는 게 선량한 사람살이일 것이다. 어느 높이에서든 조금 덜 힘든 사람이 더 힘든 사람을 위해 기꺼이 베푼 것이, 인간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발전해가는 기반이 아닐까. 중앙의 고위직이 아닌 향신(鄕紳)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베풂은 이웃을 넘어 낯선 외국인에게까지 전해졌으니 결코 ‘향신의 덕’만은 아닐 것이다.

安于未雨綢繆固(안위미우주무고)
貞觀沐風謐静多(정관목풍밀정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미리 단단히 준비했기에 편안하고, 수고로이 노력하였기에 평안하여 바른 도리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미우주무(未雨綢繆)는 시경에 나오는 말로서 성채 규모의 큰 집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고, 목풍(沐風)은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뜻으로 객지를 다니면서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뜻이다. 도적떼가 들이닥치면 인근의 주민 전부를 안정보 안으로 피신시키고는 그들과 힘을 합쳐 방어함으로써 대의를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건축물은 그 자체로도 종합예술로 대접할 만하지만 그 위에 사람의 뜻이 스며들면 훨씬 더 아름다운 역사적 가치를 구현해낸다. 안정보가 그런 사례가 아니겠는가. 스마트시티나 신문명 도시 같은 미래의 도시 역시 건축기술만의 이슈는 아닐 것이다. 그 시대적 맥락이 아름다운 마음과도 연결될 때 더욱 바람직한 미래도시가 나오지 않을는지.

나와 같은 여행객의 짧은 생각을 더 이상 주절댈 것은 아니라 이만 줄인다. 토루와 조루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발상법을 제공할지는 미래도시 연구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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