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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브리프] 천황에게 인권을: 일본 천황 생전퇴위론의 전개와 쟁점

이은경 (서울대 일본연구소)

2017.05.29

프로젝트: 국내 5대 협력연구기관 공동기획 - 세계 싱크탱크 동향분석
제목: 2017년 개헌논의와 각국의 정치 체제 (3) 일본 - 천황에게 인권을: 일본 천황 생전퇴위론의 전개와 쟁점
저자: 이은경 (서울대 일본연구소)
No.2017-17


여시재는 국내 5대 협력연구기관과 공동기획으로 세계 싱크탱크를 중심으로한 각국의 현안과 주요 연구동향을 파악하고 있다. 이번 기획의 주제는 개헌논의와 각국의 정치 체제로 고립주의, 트럼프 현상 등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한계이다. 헌법개정, 선거제도 개혁 등, 각국 정치체제에 주어진 현안 혹은 당면 과제는 무엇이라고 인식하는지를 살펴보고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미래를 바라보는 각국 싱크탱크들의 예측과 제안을 들어본다.

# 용어의 사용에 관해: 일본에서 천황을 실제 숭배하는 의미로 부를 때에는 ‘천황’이 아니라 ‘천황 폐하’라고 합니다. ‘천황제의 폐해’ ‘상징천황’ 등등, 이미 ‘천황’은 역사적 학술용어로 정착되었기에 이를 ‘일왕’이라고 쓸 경우 글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는 점을 미리 적어둡니다.

2016년 7월 13일 NHK는 현 헤이세이 천황에게 이른바 ‘생전퇴위’의 의사가 있다고 보도했다. 8월 8일에는 천황이 영상을 통해 퇴위의 의사가 담긴 이른바 ‘비디오 메시지’를 발표했다. 직접적 의사 표명이 아니라 그러한 뜻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내용이었음에도, 국민 80% 이상이 82세 고령의 천황의 ‘생전퇴위’에 찬성했으며(8.8), 이후 90% 이상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생전퇴위 실현까지는 지난한 여정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천황의 생전퇴위에는 ‘위헌’의 소지가 있다. 헌법 제2조에는 “황위는 세습하는 것으로, 국회가 의결한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승한다”고 되어있으나, <황실전범> 제1장에는 “제1조,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이를 계승한다.”고, “제4조, 천황이 사망했을 때는 황사(皇嗣)가 즉시 즉위한다.”라고 되어있을 뿐, 천황 생존 중의 ‘퇴위’ 혹은 ‘양위’의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쇼와천황이 82세였던 1984년에도 중의원에서 천황의 생전퇴위에 관한 질의가 있었다. 당시에는 첫째, 퇴위한 천황이 현역 천황을 능가하는 ‘상황’으로 군림하여 이중권력이 될 우려가 있다, 둘째, 천황의 자유의사를 확인하기 어려워 강제적으로 퇴위시킬 빌미가 될 수 있다, 셋째, 자의적 퇴의가 가능해지면 ‘국민의 총의에 기반하는’ ‘상징천황’으로서의 지위와 모순된다는 등의 이유로 부정적이었으며, 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견해다.

하지만, 82세 고령이라는 헤이세이 천황 개인의 사정뿐 아니라 매년 약 200건의 행사 개최(참여는 700여 건), 약 1000 건의 서류를 [꼼꼼한 검토 후에] 결재하는 등 격무의 현실이 알려지면서, 그리고 해외순방과 외국사절 접견이 급증하는 시대적 변화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천황의 퇴위 의사에 어떤 식으로든 [정치인을 비롯한] 일본 국민이 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천황의 생전퇴위가 가능한가’라는 질문 앞에 각각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첫째, 여전히 천황의 퇴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과 어떤 식으로든 이를 수용하자는 입장으로 크게 나뉜다. 전자는 황실의 전통에 집착하면서 ‘섭정’이나 ‘직무대행’을 세워 직무를 줄이는 방식으로 문제를 타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천황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는 사실이 여러 경로로 알려졌고, 국민의 90% 이상이 고령인 천황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후자, 즉 생전퇴위 수용을 전제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가야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단계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첫째는 현 천황에 한정하여 예외로 인정할 것인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도록 법제화할 것인가이다. 전자라면 의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며 후자라면 <황실전범>을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황실전범>을 따르도록 한 헌법 규정에 어긋난 편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물론 헌법의 해석만으로 집단적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한 전력이 있는 아베 정권에게 큰 부담은 아니다). 둘째, <황실전범> 개정의 경우에도 소극적 개정과 적극적 개정으로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즉, 천황의 생전퇴위 가능만을 목적으로 해당 조문만을 수정하거나 부칙을 달 것인가, 황실의 후계자 부족과 고령사회화 등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적 개정을 시도할 것인가라는 선택이 남는다.

후자라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첫째는 여성·여계천황의 허용 여부다. 이는 현재 황위계승 가능자가 4인에 불과하며, 앞으로도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암담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일본 사회에 ‘남녀평등’이라는 메시지를 환기하는 효과도 있다. 둘째로는 현재의 이른바 ‘상징천황’ 및 황실의 공적 역할에 대한 전면적 재고다. 대개는 국민주권 등의 규정이 오기 마련인 헌법의 가장 처음, 제1조~제8조가 천황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진 이례적인 헌법부터 수정하고, 천황의 업무 경감뿐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게 황실과 황족을 짓누르는 과도한 관심과 기대도 벗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천황의 임기제도 고려할 만하다.

2016년 9월 아베 정권은 천황의 생전퇴위를 논의하기 위한 유식자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천황의 퇴위 의지와 그에 대한 국민의 높은 지지에 떠밀려 마지못해 반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의 대상에서 황위계승 즉 여성과 여계천황에 대한 고려는 배제한 채 현 천황의 ‘고령’만을 상정하기로 했으며, 백지상태에서 폭넓게 의견을 듣겠다던 공언과 달리 처음부터 현 천황 ‘일대에 한하여’ 특례법을 제정하여 퇴위의 길을 트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실제 2017년 3월 현재 자민당은 이러한 방침을 확정하고 공명당과 오사카유신회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등, 특례법에 의한 퇴위 방안에 대한 지지확보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 천황이 ‘생전퇴위’ 의사를 드러낸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상징천황제 혹은 <황실전범> 등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의견이 분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볼만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인데, 일본인에게 중요한 것과 한국인의 관점에서의 중요도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첫째, 현 <황실전범>을 비롯한 천황제의 존재방식이 여전히 즉 ‘대일본제국’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흔히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GHQ에 의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일본을 만들기 위한 [‘평화헌법’으로 알려진] 새로운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고, 신격화되었던 천황은 이른바 ‘인간선언’을 통해 ‘상징천황’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헌법의 가장 처음 제1~8조는 여전히 ‘천황’에 관한 것이다. <황실전범>의 내용 또한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과 동시에 제정된 <(구)황실전범>의 내용을 상당 부분 답습하고 있다. 에도시대까지 거의 절반에 달했던 천황의 생전퇴위 즉 ‘양위’, 10번이나 등장했던 여성천황의 존재가 금지되어 남성·남계천황으로만 한정된 것은 강력한 천황상을 추구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현대 일본의 황실은 여전히 메이지시대의 유산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둘째, ‘대일본제국’ 시대의 유습을 완전히 떨어내지 못한, 전후 어중간하게 개정된 헌법과 <황실전범>이 현대 일본 천황제의 운용과 존속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패전 후 새로운 <황실전범> 제정 당시 ‘여성·여계천황’을 용인하자는 의견이 무시된 결과, 근대와 달리 ‘측실’(側室)이 용인되지 않는 현대에는 후계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천황은 ‘국정’(国政)에 간여할 수 없다거나 <황실전범>은 ‘의회의 의결’에 의한다는 등 [일견 과거의 ‘흠정’(欽定)에 비해 민주적으로 보이는] 헌법의 규정은, 도리어 현 천황과 황실의 융통성 있는 운신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번 천황의 생전퇴위 의사 표명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당사자인 천황은 고령과 질병 등으로 설령 퇴위 의사가 있어도 [자신의 의사표명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갖지 못한다’고 정한 헌법에 저촉될까 함부로 말하기 어렵고, <황실전범> 개정의 권한을 가진 의회에서는 감히 먼저 ‘퇴위 운운’하는 무례를 범할 수 없다. 차라리 황실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흠정의 성격을 가진 <(구)황실전범>이었다면, 이러한 고착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한탄이 나온다.

셋째, 천황의 의미는 그 ‘능력’(혹은 역할)에서 비롯되는가, ‘혈통’(혹은 지위) 자체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이다. 현 천황의 경우, 이른바 ‘열린 황실’을 표방하면서 <황실전범>에 명시된 역할뿐 아니라 스스로 ‘상징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전심전령’으로 수행한 결과, 이전 천황에 비해 배가 넘는 업무를 소화했다. 더 이상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완수하기 어려워 그만 물러나고 싶다는 것이 천황의 의사이지만, 천황의 존재 가치는 ‘혈통’ 그 자체라는 인식을 가진 이들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섭정이나 대행을 두거나 패전 직후 국민으로 편입(신직강하)된 구(旧)황족을 다시 황실로 복귀시키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라도, 여성 및 여계천황을 배제하면서 근대 이래의 천황 계승 방식을 유지하려 한다.

넷째, 천황가 계승자로 태어난 이에게는 이를 선택할 권리, 즉 인권이 인정될 수 없는가. 천황의 생전퇴위를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중 하나는, 천황에게 ‘퇴위’를 선택할 권리를 준다면 결국 천황 ‘즉위’를 거부할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천황제 혹은 황실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 우려가 있기에, 혈통에 의한 계승제도를 엄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천황에게 천황 즉위를 거부할 자유를 주지 않는 현실은 당연한가? 이는 일본의 헌법 제18조 “누구라도, 어떠한 노예적 구속도 받지 않는다. 또 범죄로 인한 처벌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뜻에 반하는 고역에 종사하게 할 수 없다.”에 반하는 것이다. 모든 일본인이 이러한 인권을 누릴 때, 오로지 한 명만은 ‘직업(천황)을 강요받고 남(국회)이 장해준 법(황실전범)에 따라 살다가 늙어서 죽기’까지 선택의 자유는커녕 정치적 행위도 불가하다. 결혼조차도 10인의 황실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1946년 1월 이른바 ‘인간선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본의 천황은 여전히 인권을 누리는 인간도 주권을 향유하는 국민도 아닌, 의무만이 있으나 모두가 이를 당연시하는 ‘특별한 존재’다.

다섯째, 왜 하필 천황은 ‘지금’(2016.7~8) 자신의 생전퇴위 의사를 밝혔는가, 그 타이밍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일본에서 이른바 황실의 위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고이즈미 정권이 2004년 여성 및 여계천황의 용인 등을 논의하기 위한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회의>를 운영했었고, 민주당의 노다 정권도 황족의 확대를 위해 여성 미야케(宮家) 창설을 검토하는 등, 역대 정권은 꾸준히 ‘황실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반면, 아베 정권은 [천황이 수년 전부터 고령을 이유로 주변에 퇴위 의사를 밝혔음에도] 황실문제를 방치하면서 숙원인 헌법 개정을 추진하기 위한 기반 구축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천황은 그러한 아베를 향해 몽니를 부린 것인가?

천황의 의도를 누구도 알 수는 없다. [최근 아베의 3선 연임 가능성이 열렸지만] 본래 아베의 임기는 2018년 9월까지였고, 임기중에 개헌을 마치려면 결코 여유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개헌에 필요한 의원의 수는 확보했으나, 주변국의 경계어린 시선을 물리치면서 개헌을 위한 국민의 지지까지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헌을 향해 잰걸음을 하려는 아베에게, 천황의 ‘생전퇴위’ 표명은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분명 천황의 퇴위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변화의 가능성을 크게 상정할수록 이에 대한 검토와 의견 수렴, 제도 개정에 이르는 시간과 공력의 소비도 컸을 것이다. 그만큼 개헌에 집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외를 인정하는 특별법 제정으로 향하려는 현 정권의도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 자민당의 규정 변경을 통해 아베 신조의 총리 3선의 가능성이 열렸다. 천황 퇴위에 관련한 일정을 아무리 최소화하고 서둘러도 2017년 법안 마련과 의회 통과, 2018년 퇴임이라는 일정이 최선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아베 자신의 임기 연장은 개헌을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었던 것 아닐까. 다만 최근 표면화하고 있는 이른바 ‘국유지 매각 의혹’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타격이, 금후 아베의 정치적 위상과 연임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는 당장 예측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생전퇴위가 실현된 이후 천황의 행보다. 현재 퇴위 후에 대해서는 현역 천황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 외에는, 주로 그의 주거지, 생활비, 혹은 ‘삼종신기에 대한 증여세 부과 여부’ 등등 흥미 위주의 관심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필자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는 것은 퇴위 후의 그의 ‘생활’이다. 그는 퇴위의 이유로서 상징천황으로서 수행해야 할 업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없다’는 점이 거론되지만, 관점을 바꾸어서, 도리어 ‘상징천황이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 그러나 자연인으로서 하고 싶었던 일이나 말은 없는 것일까?

순수혈통의 유지 운운하며 천황의 생전퇴위를 반대하는 이들의 속내는, 어쩌면 현 정계의 보수·우경화와는 결을 달리하는 현 헤이세이 천황의 자유로운 언동에 대한 경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존퇴위 문제의 결론이 무엇이든, 현재의 천황제가 지금 그대로 장기간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 그 미래도 결코 장담하기 어려워 보인다. 판도라의 상자가 이대로 닫힌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시 열릴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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