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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야 요시히데 "아시아 및 세계 경제 성장에 공헌하는 것이 일본외교의 축"

작성자 : 황세희 2017.03.14 조회수 : 2913

한일관계의 경색 국면이 장기화하는 사이 일본의 적극적인 대외전략 전개 속에 한국이 상대적으로 경시되고 왔다. 동북아 질서 형성에 한국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한일 협력을 전략자산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 인터뷰는 그간 정치 및 역사 문제에 치중하여 등한시되어온 한일간의 전략적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현재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2016년 9월 시행되었다. 소에야 요시히데 게이오대 교수는 동북아 질서 안정을 위한 한일간의 협력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전문가다.

인터뷰:황세희 SD 


Q. 일본외교의 힘, 또는 일본외교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일본외교의 저력으로서 유효하게 기능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먼저 답을 하기 전에 일본외교의 기반에 대 설명하고 싶다. 전후 일본외교의 기반은 1945년부터 1952년의 미군정 점령기에 성립된 전후 헌법(특히 국제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서 무력 사용을 포기한 제9조)와 미일 안보조약을 두 기둥으로 하는 ‘9조-안보체제’에 있다. ‘9조-안보체제’ 하에서, 자위(自衛) 이외에 일본이 단독으로 국제사회의 권력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헌법상 불가능했다. 그보다는 미일 안보조약에 의거하여 동아시아의 안전보장문제에 미국이 관여하고 일본이 이를 지원하는 역할이 주를 이뤘다. 이러한 구도 속에 일본은 미국주도의 국제질서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 결과 ODA외교가 보여주는 것처럼 아시아 및 세계의 경제 성장에 공헌하는 것이 일본외교의 축이 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아시아 외교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례로, 전후 배상을 계기로 시작된 동남아시아 국가에의 원조 정책은 상당부분 전후일본의 경제 부흥과 세트로 이루어졌다.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함께 시작된 한국에 대한 경제 지원이나 동남아시아 지역통합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와 민간의 연대가 기초가 된 경제 원조 외교(후쿠다 독트린)와 차후의 인간 안전보장(bottom-up의 경제사회 정책), 정부의ODA와 민간의DFI를 두개의 바퀴로 했던 중국의 현대화 지원 등등이 같은 예로 들 수 있겠다.



Q. 아시아 및 세계 경제 성장에 공헌하는 일본외교라는 특징은 일본의 일본외교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고 실질적으로 일본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고 평가 받지만, 대외적인 비판 또한 존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적한 대로, 일본의 이러한 경제원조 외교는 일본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히모츠키 엔조(ひもつき援助) 라고 비판 받았다. 전후 배상을 대신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조 정책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60년대 이후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재부상하자 이러한 원조방식에 대한 반발이 국제 사회에서 확산되었다. 일본에 대한 반발은  다나카 수상이 아세안 국가들을 순방했던 1974년, 자카르타에서 반일 폭동 등 격렬한 반일 무드가 분출된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의 동남아에서 만연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일본 사회에도 충격적이었고, 기존의 경제원조 외교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이루어졌다. 1977년 8월 아세안 순방에 나선 후쿠다 수상이 마닐라에서 발표한 후쿠다 독트린 은 이러한 경제원조의 실책을 수정한 동남아시아 외교 3원칙으로 일본외교에 정착되었다.


후쿠다 독트린 이후, 일본의 경제원조 외교는 경제원조 사업을 제3국이 담당하기도 하는 등, 상호 존중과 공평한 원조 방식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를 통해 이루어진 ODA 정책은 1980년대, 일본을 세계 최대의 ODA국가로 정립하게 하였다.


후쿠다 독트린 이후의 ODA 정책은 크게 두가지 목적 혹은 의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동남아시아의 경제 발전을 지원한다는 경제적 논리가 존재한다. 둘째로는 일본이 자국중심주의에서 개방적인 국제주의로 하고 동남아시아의 지역적 통합을 지원, 촉진한다는 지역 전략적 의의가 있다. 특히 지역 전략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는 ODA를 이용해 전쟁을 거듭해온 인도차이나와 아세안 국가간의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는 일본에게 있어서는 자국중심적인 이익보다는 국제적인 역할을 기여한다는 일본외교의 기조를 정착시켰다는 의의를 지닌다.



Q. 당시의 대 중국 외교에도 이러한 기조가 유지되었다고 보는가?


그렇다. 아시아 안정과 통합에 기여한다는 일본외교의 기조는 앞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ODA와 DFI를 결합한 중국의 현대화 지원 정책에서도 유지되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일본의 동남아 외교에는 중국을 견제 혹은 대항한다는 의식은 전혀 없었고 중국의 경제, 사회적 안정을 통해 정치민주화를 유도한다는 논리가 통용되었다. 중국에 대한 일본 사회의 여론 역시 훨씬 호의적이어서 중국의 현대화 지원은 아시아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본외교의 당연한 아젠다로서 이해되었다. 물론 이러한 외교 노선에 불만을 가진 일부의 식자층이 존재했음은 사실이나 일본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현재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아울러 경제를 축으로 한 외교를 전개하는 것에 있어, 일본외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권력정치, 혹은 패권정치에 관해서는 스스로 관여되기를 자제해 왔고,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관해서도 저자세로 일관해 왔다. 일본 정부는 아시아가 서구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경제 성장이 사회 안정을 이끌고 그를 통해 정치 민주화가 달성된다는 테제를 공언해 왔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의 천안문 사건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국제사회의 논조와는 선을 그었던 일본 정부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중국을 고립화 시켜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견지했다. 중국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 중국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하면서부터 였다.


종합하자면, 이러한 1970년대 이후 변화된 일본외교는 결국 태평양 전쟁이라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에 입각하여 전후 국제사회에 더욱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자기주장에는 금욕적인 반면 상호 이해에 중점을 둔 일본 공공외교에도 이 같은 특징이 나타났다고 하겠다. 



Q. 공공외교에 주력한 일본외교의 기조 역시 전후외교의 맥락에서 일관되었다는 뜻인가.


그렇다. 평화 헌법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참여하는 것에 제약이 따르는 일본으로서는 국제사회에 경제대국으로서 복귀한 이후, 국제 공헌에 주력하는 것이야 말로 변화된 일본을 국제사회에 인식시키는 길이라고 여겼다. 공공외교의 경우, 처음에는 전쟁의 과거가 남긴 일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 자연스러운 목적이었다. 전후의 일본이 제국주의에 몰두했던 과거에서는 완전히 결별하였다는 스스로의 인식을 타국에 전파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1970년대 동남아에서 일어난 반일감정의 폭발은 이러한 공공외교의 노선에도 전면 수정을 가져왔다. 1972년 설립된 국제교류기금이전후 일본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지적 교류, 지적 대화, 외국 인사의 초청과 같은 사업을 전담하게 된 경위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역사 문제나 영토 문제와 같은 정치적 문제를 취급하지 않고 지적 교류를 추진하는 장으로 공공외교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러한 일본의 공공외교가 최근에 들어서 일본 정부의 주장을 전달하는 통로로 변질된 것은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Q. 일본외교에 있어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1970년대 동남아의 반일 감정 폭발했던 시기였다면, 일본 국내에서 일본외교를 재고찰하게 한 충격적인 사건은 무엇이었나.


냉전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던 이라크 전쟁은 ODA 중심의 일본외교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국제사회의 다국적군이 이라크 전쟁에 참가하였던 것에 반해, 일본은임시증세 등의 조치를 통해 최종적으로 총액 130억 달러를 공헌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를 두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수표외교'라고 야유를 당했고, 이라크 전쟁 종결후, 쿠웨이트 정부가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게재한 감사 광고에는 미국을 비롯한 30개국의 명단이 기재되었으나 그곳에 일본의 이름은 없었다. 걸프전쟁에서의 미숙한 대응은 일본사회에서 일본의  '패배'라고 평가될 정도로 정책 결정자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걸프 쇼크’라고 불리어지는 이라크 전쟁의 충격은 경제원조에 주력해온 일본외교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의식하여 국제 공헌에서 일본의 역할을 재고하는 전기가 되었다. 이후 캄보디아 평화유지군 파견 등으로 구체화된 자위대의 국제평화활동이 일본이 중시하는 외교적 행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기존의 ODA외교가 단순히 돈으로 충당되었다면, 앞으로는 땀을 흘리는 인적 부분에서의 국제 공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일본사회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일본 정서상 비록 피를 흘리는 국제 공헌은 제외로 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Q. 냉전 종식후 확대된 자위대의 해외 파견에 대하여 일본을 경계하는 의식도 함께 고조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를 일본이 가진 ‘이중 아이덴티티’라고 부른다. 일본의 국제사회에의 기여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하는 유럽 및 서구 사회의 평가와,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경계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즉, 전후 일본을 둘러싼 과소 평가와 과대 평가가 국제 사회에는 존재한다. 근래에 들어 동남아에서는 일본에 대한 경계감이 전무하다고 보여지지만 한국과 중국에게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Q. 최근의 일본외교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러한 경계감이 더욱 강화된 것이 사실이다. 


아베 정권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안보 논의들이 ‘전후 레짐에서의 탈피’라는 충동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흔들림 속에서도 앞서 말했던 ‘9조-안보체제’의 일본외교의 구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사회의 우경화가 진행되어 왔으나 1998년의 김대중 오부치 공동성명에서 드러나듯이 일본 정부의 기조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로 인해 고이즈미 정권에서 한중관계가 파탄에 이른것은 지극히 안타깝지만, 정부의 기본 기조는 전후 외교의 연장선에 있었다. 


대중 경계감이 뚜렷해진 것은 역시 1차 아베 정권부터이고, 현재의 아베 정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선명해 지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외교 노선의 본질과  아웃풋으로서의 정책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집단적 자위권 논의 역시 결국은 9조 해석을 확대하였을 뿐, 헌법을 지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헌법 해석을 확대하는 것으로 9조를 개정하려 한 충동이 어느정도 해소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유사시 일본이 한국을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게도 플러스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이 한국이 지닌 일본에 대한 경계감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Q. 일본외교가 가진 복잡한 성격을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 사회에 아베 신조라는 인간은 두 명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개인으로서의 아베가 존재하고, 수상으로서의 아베가 존재한다. 아베라는 개인의 이념 혹은 신조를 한국 사회는 주목하지만, 수상으로서 그가 취하는 행동이 반드시 개인적인 사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상으로서의 아베는 여전히 ‘9조- 안보 체제’가 규정한 전후 일본외교의 맥락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일본외교가 아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패권 경쟁, 즉 국제 사회의 권력 정치 구도 속으로 복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본외교의 특징을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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